1895, 1896을 넘어 1902, 그리고 1903.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숫자들은 어디까지 이어지게 될까. 바로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 중 국내 최장기 투쟁이 된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의 투쟁 일수이며 그들의 아픈 기억과 현재 진행 중인 고통과 노력이 담겨 있는 숫자다. 잊혔던, 잊힐 뻔했던 (그러나 결국 잊히고 없어져야 할) 이 숫자를 다시 불러온 이들이 있다. 재능교육 본사 길건너편에 위치한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의 5기 동인이 그들이다. 작은 극장에서 연극인의 길을 걸어가는 그들은 노사 양쪽에 ‘아름다운 동행’을 요청하며 더불어 우리 모두에게 동행을 제안했다.
공연을 열기 위한 1300만원이 순식간에 모금되고 연출가·극작가·배우 67명의 재능 기부, 연극인 343명의 선언문을 거쳐 공연은 성황리에 끝마치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재능교육 사옥 앞에서는 천막농성이 벌어지는 가운데 혜화동 1번지 5기 동인 중 맏형 격인 윤한솔(41) 연출가를 만났다. 열흘간 ‘아름다운 동행’을 공연했던 무대는 ‘2012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을 받은 이란 작품을 위해 변모해 있었다. 병원이 극중 무대인지라 소독약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흰색 붕대가 장식된 극장에서 그는 차분히 재능교육 해고노동자와 대학로 연극인들이 함께한 단막극 페스티벌 ‘아름다운 동행’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천 명이 넘는 관객에 흑자 공연“혜화동 1번지 5기 동인들 사이에서 오래 전부터 논의되던 이야기였습니다. 동인 중 이양구 연출가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고 연출가마다 서로 다른 취향,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작업을 해야겠다는 공감대가 있었어요.” 곧바로 재능교육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과 공부, 강연과 연습을 통해 준비가 이뤄졌고 공연에 필요한 경비도 자발적인 참여로 마련됐다. 기대 이상의 관심을 받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걸 노린 것은 아니었다. 몇 년 동안 건너편의 재능교육 일을 보며 ‘이게 남의 일이 아닐 수 있겠다’라는 인식이 조금씩 생겨났고 그렇게 시작된 일이라 한다. “처음엔 우려도 있었고 혹시 그분들에게 누가 되는 일이 아닐까 했지만 다행히 우리의 작업을 반겨주셨고 공연도 보고 가셨습니다.”
페스티벌에 대한 호응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걱정도 있었지만 1천 명이 넘는 관객이 왔고 공연도 흑자였다. 남은 돈은 “다른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연대”로 이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우리의 목적이 선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목적은 미학이고 예술입니다. 비록 파급력은 작을 수 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어요.”
문학·영화 등 타 분야에 비해 현재의 사회적 이슈에 대해 연극의 목소리가 작아진 것은 아니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극은 타 분야에 비하면 순발력이 떨어지지 않나 싶어요. 공부도 해야 하고 연습도 하다보면 석 달은 필요하지요.” 그러나 그렇기에 일회성 관심에 그치지 않고 말하고자 하는 대상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윤한솔 연출가가 ‘아름다운 동행’에서 선보인 연극은 학습지 교사가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라는 작품이다. 해고를 통보해야 하는 직장인, 그는 출근을 거부하고 싶다. 그러나 통보하지 않으면 자신이 해고된다. 이런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무엇일까. 현실이 쉽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렇다면 왜 쉽지 않은가. 왜 더 어렵게 가고 있는가. 누가 그렇게 만드는가. “이런 문제를 자각하는 것에서 싸움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시간에도 누군가는 고난을 겪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 연극연출가의 길을 걷게 됐을까. “원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로 사회학과를 택했다. 그리고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전까지 연극을 본 적이 없었어요. 처음엔 영화 동아리에 갔는데 그들보다 훨씬 진지한 자세로 세상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연극 동아리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며 연출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원래 전공이 아닌 연극영화과 수업을 더 많이 듣다보니 한번은 사회학과 교수가 ‘자네는 무슨 과 학생인가’라고 물을 정도였단다. 여전히 집안의 반대가 심했지만 4학년 2학기 때 우연히 마주친 연극과 교수님과 아버지의 통화 뒤로 계속 연극의 길을 걷게 됐다. “그때 무슨 말씀을 나눴는지 교수님과 아버지,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웃음) 사람 일은 참 알 수 없습니다.”
유학 갔던 미국에서 9·11 겪고 변모사회문제보다 연극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던 그를 결정적으로 변모하게 만든 우연, 아니 운명적인 사건이 2001년에 찾아왔다. “뉴욕에서 유학을 하던 중 어느 날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너 괜찮아?’라는 전화였죠. 집에서도 난리가 날 정도로 전화가 왔어요.” 바로 9·11 테러 사건이다. 실시간으로 비행기가 부딪히고 분진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퍼져가는 그 사건의 현장 속에서 그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라는 질문에 빠져들게 됐다. “그때부터 공부가 시작됐어요. 사회학적 지식, 네그리와 지제크 같은 학자들의 책을 열심히 읽었고 그것이 지금의 자양분이 됐습니다. 결국 원래 전공이던 사회학으로 돌아온 것이죠. 일종의 정체성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기도 했어요.”
그러나 현실의 그는 극단 ‘그린피그’의 대표이기도 하다. “극단은 서비스업이지요. 결국 연극 생산 시스템에 편입돼야 하는데 이게 조선시대의 남사당패보다 더 자유로움이 없는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대로 연극을 하기 어려운 풍토에 나름의 저항과 거부를 하고 싶습니다.” 그가 덧붙인다. “예술가는 쉽게 말할 개념은 아니지만 직업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죠. 살아 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시스템에 생채기라도 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실패할지라도 계속 반복하는 것이죠.”
다음 작품 국가보안법 다룬 연극그동안 거침없이 해방 공간, 이주노동자, 한국전쟁 등 굵직한 주제로 작품을 연출해온 그에게 연극 말고 가장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 물었다. 그는 대번에 답변을 했다. “요리, 언젠가 조그만 식당을 열어 요리를 하고 싶습니다. 음식하는 건 연극과 비슷해요.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의껏 해야지요. 또 하나 꼽자면 밴드, 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뿐인 정신, 헌신 등에 매달리지 않는 진정한 자유주의자가 되고 싶다는 윤한솔 연출가와의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의 다음 행보에 대한 기대를 품게 됐다. 살짝 힌트를 얻었는데 다음 작품은 국가보안법을 다룬 연극이 될 것이란다.
글 윤성훈 제4회 손바닥문학상 수상자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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