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결과를 놓고 ‘멘털 붕괴’를 고백하는 사람이 많다. 아마 이들은 탈도 많고 말도 많지만, 그래도 야권 연대의 두 정당이 과반수를 얻으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리라. 위로가 될지 더 약 올리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애초 기대할 수 없던 ‘개꿈’이었다. 현재 한국 ‘대의정치’의 구도는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생겨난 이래 처음으로 총선·대선이 시행된 1992년에 형성됐고, 이번 총선에서도 야권 쪽에서 그 구도를 깰 만한 무언가는 내놓지 못했다. 지난 20년간 벌어진 총선에서 나왔을 법한, 또 실제로 나왔던 결과가 다시 나온 것이다.
구려도 보통 구리지 않은 보수대연합
민자당이 생겨난 과정을 가만히 복기해볼 필요가 있다. 1987년 이전의 한국 사회는 군부독재 세력을 정점으로 한 일부 기득권 계층이 거의 모든 권력과 부를 싹쓸이해 독점한 상태였고, 이에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는 개인이나 세력은 야수적인 폭력으로 짓밟는 체제였다. 1987년의 대항쟁 이후 노태우 정권 시절에 이 체제는 분명한 개조를 겪었다.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은 물론 사회 전체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폭증했고, 의회는 여소야대의 4당 구조로서 당시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은 참으로 딱한 찐붕어 신세가 될 때가 많았다. 여기에서 돌파구가 된 것은 일종의 ‘보수대연합’ 체제였다. 당시의 4당 구조는 경북·경남·호남·충청이라는 지역 정당 구조였다. 따라서 계급적·계층적으로 보면 그 이전에 비해 상당히 열린 기득권 구조가 된 새로운 체제에 대해 이해를 같이할 상류 계층이 정당의 지역 구도로 인해 하나로 뭉치지 못한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충청·경북·경남의 정당들이 하나로 뭉쳐 수도권의 보수 및 기득권 세력까지 하나로 아울러 호남 세력을 고립시키고 기득권에 도전하려는 전국의 민주화 세력을 분열시켜버리는 전략이 바로 민주자유당 출현의 계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오늘날까지의 총선과 대선을 보라. 넓은 의미에서의 보수 세력이 가져간 표는 보통 절반 정도였다. 범야권 세력은 호남과 수도권의 표를 모두 끌어모아봐야 이런 대립 구도에서 고립과 파편화를 면치 못하고 항상 소수였다. 이 구도가 깨진 것은 비상한 상황에 비상한 인물이 출현해 비상한 전략을 취한 경우인 딱 두세 번뿐이다. 한 번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이인제 후보의 출마 상황에서 DJP 연합을 펼친 1997년 대선, 또 한 번은 노무현이라는 걸물 정치인이 출현해 월드컵으로 떠오른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까지 숨가쁘게 치달았던 ‘노풍’의 2002년 대선, 마지막 한 번은 탄핵 열풍이 몰아친 2004년 총선. 그뿐이다. 극히 예외적인 이런 상황을 빼면 대략 며칠 전 총선과 같은 결과와 구도가 지난 20년간 오히려 하나의 정상적 상태였다. 하도 ‘몇 년 체제’니 하는 말이 난무하는 상황이라 또 무슨 ‘92년 체제’니 하는 신조어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의 제도 정치판 구도가 1992년에 가시화된 보수대연합의 구조 안에 계속 갇혀 있다는 것은 비록 거의 언급하는 이도 없이 망각됐지만 내게는 하나의 자명한 사실로 보인다.
그렇다면 1992년에 완성된 보수대연합 정치 구도는 난공불락의 ‘쇠우리’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정치 구도는 지금 사방에서 근본적 도전에 처해 있고, 도처에서 물이 새나오고 콘크리트가 부서져 떨어지는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이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난 20년간 대한민국의 산업구조가 엄청나게 변했고, 이로 인해 사회적 구조도 1992년과 비교하면 거의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는 데 있다. 1992년은 막 고임금·대량소비·대량생산의 한국판 ‘포디즘’이 시작된 때였지만 그 뒤 한국 경제는 금융화, 신자유주의, 정보기술(IT) 붐을 겪어 지금은 ‘지식경제’ 운운하는 탈산업사회의 경향이 나오고 생태·복지 요구까지 거세게 터져나오는 대단히 ‘성숙한’ 경제로 탈바꿈했다. 이런 변화로 인해 세대, 지역, 계급·계층, 문화·정신적 측면에서 1992년에 만들어진 보수대연합 체제는 한마디로 구려도 보통 구리지 않은 것이 돼버렸다. 야권으로 나서는 기성 세력도 한물간 세력으로 치부됐다. 이른바 ‘난닝구’로 지칭되는 호남 기득권 세력은 물론이요, ‘경기 동부’니 무어니 하는 이름으로 불리는 민족해방(NL)과 민중민주(PD)의 각종 ‘정파’들이 장악한 진보정당들도 마찬가지다. 변화된 산업구조와 사회구조는 아득한 옛날의 포디즘 시절 초입에 생겨난 정치 구도와 도처에서 충돌해 파열음과 파열구를 만들다가 지쳐 떨어져 지극히 낮은 투표율로 귀결되고 말았다.
‘김칫국 중독’에 빠진 야권
이런 현실에서 새로운 산업사회의 현황에 근거를 둔 절실한 문제들을 매개로 해서 지역과 직종을 뛰어넘는 횡적 사회세력을 조직화하는 것만이 이 1992년에 만들어진 쇠우리를 깨는 길이다. 다행히 최근 몇 년간 복지 요구가 터져나왔다. 살인적인 등록금 문제도 제기됐고 고령화, 여성노동의 현실과 보육·출산, 노동시장 개혁, 주택, 4대강 사업 등 그동안 낙후된 법적·제도적 장치 때문에 묵힌 사회·경제적 쟁점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최근 들어 이 문제들이 정치적으로 쟁점화됨에 따라 1992년의 케케묵은 제도 정치판 구도 또한 변화를 겪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산업구조와 산업사회의 모순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젊은 층과 여성들의 투표율이 치솟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40대를 기점으로 하여 여권과 야권으로 정반대로 갈라지는 세대별 투표 양상이 나타난다. 1992년 당시 30대 이상의 기성세대로서 정치의식이 찍혀나온 지금의 50대 이상은 압도적인 여권 지지 성향을 보이고, 이미 젊은 시절부터 삶의 현실과 제도 정치의 괴리를 온몸으로 느낀 30대 이하의 젊은 층들은 최근 들어 압도적인 야권 지지 성향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 해야 할 바는 너무나 명확했다. 지난 20년간 누적된 산업관계와 사회적 구조의 낙후함을 해결할 수 있는 절실한 의제로 지역은 물론 계급·계층을 넘어설 수 있는 복지·등록금·고용안정·주거안정 등에서의 동맹을 전면에 내건 새로운 사회·정치 세력의 대두를 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야권이 한 짓은 정확히 이에 반대됐다. 야권은 자신들을 20년간 포위하고 있는 보수대연합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김대중·노무현이라는 두 거인에 힘입어 가까스로 연출된 몇 번의 기회를 조금만 상황이 좋고 운때가 맞으면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정상적’ 현상으로 착각하는 ‘김칫국 중독’에 이미 젖을 대로 젖어 있다. 사실 말이 쉽지 각종 사회·경제적 의제로 새로운 횡적 연대와 사회적 동맹을 조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서 야권은 이 과제를 뒤로한 채 그저 김대중·노무현의 흉내나 내서 어떻게 분위기를 좀 타볼까에 혈안이 된 ‘이벤트 기획 회사’ 같은 조직이 돼버렸다. 진보정당의 일부 세력은 이런 과제를 뒤로하고 이념적 나르시시즘에 침몰하거나, 아니면 후안무치한 정치공학에 골몰하는 경악할 만한 구태로 이번 선거에 임했다.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투표율은 다시 뜨뜻미지근해졌고, 1992년의 범보수대연합의 밑바탕은 20년이 지난 이번 총선에서도 어김없이 위용을 과시했다.
‘92년 체제’ 해체는 ‘개꿈’ 아냐
앞의 말을 수정하겠다. 선거를 통해 이 지긋지긋한 ‘92년 체제’를 걷어치우고 새 시대를 맞아들이는 일은 결코 ‘개꿈’이 아니다. 하지만 이는 앞에서 말한 대로 그동안 곪을 대로 곪은 각종 사회·경제적 모순을 끄집어내 이것을 매개로 해서 각종 동맹으로 사회를 다시 횡적 연대하게 만드는 작업을 요한다. 이것이 본래 제대로 된 정당이 할 일이다. 야권이 이 작업을 도외시하고 계속 ‘이벤트 기획’이나 정치공학 따위에 골몰하는 한, 이번 대선은 범야권을 관에 넣고 못질하는 심판 이벤트가 될 것이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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