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이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동반성장위원회) 회의에 모두 불참하겠답니다.”
취재차 전화 통화를 한 동반성장위원회 관계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반성장위는 바로 3일 뒤인 12월13일 전체회의를 열고 대·중소기업 간 거래 관행 개선, 이익공유제 도입 등을 포함한 동반성장지수 개선안과, 제3차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등 중요 안건을 처리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재계가 이에 반대하며 사실상 보이콧 방침을 통보해온 것이다. 동반성장위 멤버는 대기업 대표 9명 외에도 중소기업 대표 9명과 공익위원 6명, 그리고 정운찬 위원장 등 모두 25명이다. 대기업이 불참해도 다수결 처리가 가능하지만, 모양새가 안 좋다. 또 당일 예정된 동반성장위 출범 1돌 기념식에도 악영향이 예상된다. “설마 그럴 리가요.” 반신반의하는 기자에게 동반성장위 관계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단다. 지난 12월6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의 정병철 부회장을 포함한 경제단체 대표들이 정 위원장을 찾아와 이미 선전포고를 했다는 것이다.
삼성 이익, 납품단가 후려치기가 절반
대기업의 보이콧이 믿기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명분이 약하다. 재계는 보이콧 이유로 이익공유제 시행 반대를 전면에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눈속임이다. 재계가 반대하는 이유는 그 외에도 여럿이 있다. 동반성장위는 올 상반기 동반성장지수를 확정했다. 이를 토대로 56개 대기업의 ‘동반성장 및 공정거래 협약 실적’을 평가한다. 하지만 현행 지수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무엇보다 과도한 납품단가 인하 등 기존 거래 관행을 혁신하기 위한 평가가 빠져 있다. 그래서 개선안에는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 상승분의 납품단가 반영, 기술개발비 100% 보상, 거래 기간 중 납품단가 인하 자제 등 지원 항목이 포함됐다. 이 내용들은 중소기업이 절실히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대부분 난색이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에 데스크톱을 포함시키는 것에도 계속 반대한다.
이익공유제 반대 이유도 궁색하다. 이익공유제는 대기업이 연초에 설정한 판매수입이나 이익목표를 초과해 달성한 경우, 그 일부를 내부 임직원에게 인센티브로 제공하는 것과 같이 협력업체에도 기여도에 따라 나눠줘 동반성장을 추구하자는 제도다. 재벌들은 반대 이유로 무려 9가지나 열거한다. 우선 대기업들이 이익이 많이 나는 것은 임직원의 노력에 의한 것이지 협력사에 대한 납품단가 후려치기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정운찬 위원장이 이익공유제의 명분으로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를 들고 있는 것에 대한 반박이다. 물론 대기업 임직원의 노력이 크게 기여한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협력사 납품단가 인하도 큰 역할을 한다. 그에 대해서는 중소기업들의 수많은 증언이 있다. 그래도 물증 제시를 요구한다면, 공정거래위원회가 2008년 2월 삼성전자 무선사업부를 부당한 납품단가 인하 혐의로 제재할 때 확보한 내부 서류가 확실한 증거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가 2002~2005년 4년간 국내 부품업체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단가 인하 규모는 3조28억원에 달한다. 단가 인하가 영업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2년 23%에서, 2005년 49%로 상승했다. 20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삼성전자 영업이익의 최소 절반 이상이 단가 인하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대·중소기업 간 영업이익률이 차이가 나는 이유가 중소기업의 체질 개선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는 주장도 변명으로 들린다. 중소기업 중에는 분명 경영혁신 노력을 게을리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공정위 조사에서 나타나듯이, 대기업의 무자비한 납품단가 인하가 중소기업의 수익성을 낮추는 결정적 요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익공유제가 시장원리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은 궤변에 가깝다. ‘시장원리’라는 말이 보수가 진보를 이념적으로 공격하는 흉기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지만, 대기업들이 초과 이익목표의 일부를 인센티브 성격으로 종업원에게 나눠주는 것은 시장원리에 맞고 협력사에 나눠주는 것은 배치된다는 주장은 억지에 가깝다. 대기업이 연초에 이익목표를 설정할 수 없기에 이익공유제 시행이 어렵다는 주장도 혀를 차게 만든다. 대기업 중에서 매출이나 이익목표 없이 경영하는 곳이 과연 단 하나라도 있는지 묻고 싶다. 요즘 연말을 맞아 대기업 경영진들이 머리를 싸매는 것도 내년 사업목표와 계획을 짜느라고 그런 것 아닌가.
삼성카드가 가진 삼성에버랜드 지분 26% 중에서 17%를 범현대가 일원인 KCC에 팔기로 합의한 ‘12·12 빅딜’을 두고 그 배경에 재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에버랜드 야경. 한겨레 자료
합의 깨지면 법·제도 강제만 남아
협력사의 기여도 산출이 쉽지 않다는 주장은 그나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 기업인들이 어떤 사람인가. 불가능을 모르는 기업가정신을 갖고 있지 않은가. 이미 오래전부터 협력업체 평가를 하고 있다. 이 역시 공정위가 2008년과 2009년 잇달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와 LCD사업부의 부당한 납품단가 인하 혐의를 조사하며 확보한 내부 서류들이 명백한 증거다. 삼성전자의 협력사들에 대한 평가 기준을 보면, 구매·품질·기술 3개 부문, 9개 세부 항목으로 나눠 분기별로 치밀하게 평가해 A~E등급을 부여한다. 삼성전자는 이를 다음 분기 구매물량 배분 기준으로 삼아 점수가 좋은 업체는 물량을 확대하고, 나쁘면 물량 감소 내지 거래 중단 조처를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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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일부 대기업은 이미 이익공유제를 시행하고 있다. STX조선해양이 대표적 사례다. 상위 평가등급을 판정받은 협력사에 대해서는 실적 결산 뒤 영업이익률이 STX보다 낮은 경우 단가 조정, 물량 증대 등으로 영업이익률을 높여준다. 동반성장위는 포스코가 시행하는 성과공유제도 내용적으로는 이익공유제에 가깝다고 말한다.
전경련은 아직 합의되지 않은 내용을 동반성장위가 강행 처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동반성장지수 개편과 관련해 7차례 실무회의를 열었다. 회의에 참석한 한 공익위원은 “대기업 대표들이 지난 7차례 회의에서 똑같은 반대 논리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을 보면 시간지연책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며 추가 논의에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은 양극화 심화로 인해 동반성장위가 조속히 성과를 내기 바란다.
대기업의 보이콧이 선뜻 믿기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그런 행동이 자신들에게 부메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대기업·중소기업 대표는 지난해 9월 말 민간 자율로 동반성장 전략을 추진한다고 합의했다. 이를 위해 지난해 12월 설립한 것이 민간기구인 동반성장위다. 많은 사람들이 수십 년간 관행화된 대기업의 불공정 하도급거래를 대기업의 자율적 협조에 의존해 추진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상당수 국회의원이나 시민단체들이 동반성장을 법이나 제도로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 연장선이다. 전경련은 이에 대해 “동반성장위를 중심으로 자율적 민간 합의 방식의 동반성장 정책을 제대로 시행해보지도 않고 무슨 얘기냐”며 강력히 반대했다. 대기업의 보이콧은 민간 자율의 동반성장 정책 추진에 한계가 있음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이는 MB식 대기업 의존형 동반성장 정책의 파산 선언이기도 하다.
보이콧의 후폭풍은 고스란히 재벌들에 돌아간다. 이제 국회에서 동반성장 정책을 법이나 제도로 강제하는 것에 누가 반대할 수 있겠는가? 내년에는 총선과 대선이 예정돼 있고, 경기는 찬바람이 예상된다. 양극화로 인한 중소기업, 중소상인, 서민들의 고통은 더 심해질 것이다. 미국의 ‘월가 점거시위’가 보여주듯, 대기업들의 탐욕에 대한 비판 여론이 더욱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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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들은 유보결정에 환호했겠지만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경련은 결국 동반성장위 회의 하루 전인 12월12일 오후 긴급 기자회견까지 열어 동반성장위 회의 불참을 공식 선언했다. 정운찬 위원장은 13일 대화 노력을 좀더 하겠다며 안건 처리를 유보했다. 하지만 그는 “이른 시일 안에 매듭짓겠다”며 이익공유제 시행 의지를 거듭 확인했다. 재벌들은 동반위의 유보 결정에 환호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재벌의 동반성장위 보이콧은 ‘자살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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