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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여자’ 아닌 ‘보통 여자’ CEO 시대?

재벌가 여성들 빼면 금녀의 영역에 가까웠던 대기업 여성 임원…이건희 삼성 회장의 ‘여성 CEO’ 발언 등 계기로 여성 임원 비율 높아지나
등록 2011-09-08 07:05 수정 2020-05-02 19:26
» 현대건설 여성 신입사원들이 서울 종로구 현대건설 본관 대강당에서 열린 신입사원 입사식에서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 현대건설 여성 신입사원들이 서울 종로구 현대건설 본관 대강당에서 열린 신입사원 입사식에서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정 상무~, 이 상무~.”

요즘 삼성그룹 계열사의 여성 부장들 사이에 오가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얘기들이다. 입사 17년 만에 올해 초 부장으로 승진한 삼성 계열사의 한 여성 간부는 “여직원들이 모두 업(up)됐다”고 상기돼 말한다. 또 다른 삼성의 여성 부장은 “여자라고 무조건 임원이 되겠느냐”면서도 오랜만에 살맛 난다는 표정이다. “이러다가 남자라고 역차별받는 것 아니냐?” 삼성의 남성 임직원 중에는 벌써부터 경계심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

대기업 여성 임원 4.7%, 삼성 1.9%

이 모든 것이 지난 8월23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여성 최고경영자(CEO)’ 발언이 몰고 온 변화다. 이 회장은 여성 임원들과의 오찬 모임에서 “여성 임원이 사장까지 되어야 한다”고 격려했다. 벌써 삼성 안에서는 올해 말 임원 인사 때 여성들의 대거 발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삼성 미래전략실 쪽도 “현재 부장급 여성 간부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당장 올해와 내년에 여성의 임원 승진이 많을 것”이라며 이를 뒷받침했다. 삼성 안에서는 가장 유력한 여성 CEO 1호 후보로 최인아(50) 제일기획 부사장이 거론된다. 그에게 따라다니는 ‘삼성그룹 여성 최초’라는 프리미엄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하다는 게 많은 이들의 얘기다. 최 부사장은 1984년에 입사한 뒤 2007년에 공채 출신 첫 여성 전무로 승진한 데 이어, 2009년 첫 여성 부사장에 올랐다.

다른 대기업들도 이건희발 ‘여풍’(女風)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여성인력 육성에 힘써왔다” “시스템상으로 남녀 차별은 전혀 없다” “우리는 업종 특성상 삼성과는 처지가 다르다” 등등. 겉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제각각이지만, 모두들 갑작스러운 ‘여풍’에 당황해하는 모습이다.

재벌 대기업에 여성 CEO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룹 총수만도 이명희 신세계 회장, 현정은 현대 회장,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 장영신 애경 회장 등이 있다. 사장급 이상도 이미경 CJ 부회장,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및 삼성에버랜드 사장, 이화경 오리온 사장, 조현아 칼호텔네트워크 대표 등 여럿이 있다. 부사장 이하 임원급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재벌 총수의 부인, 며느리, 딸이다.

이런 ‘왕의 여자들’을 제외하면, 한국 재벌 대기업들은 사실상 ‘금녀의 땅’과 다름없다. 한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직원 1천 명 이상인 국내 대기업의 임원 중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4.7%에 불과하다. 3년 전인 2007년에 비하면 3배 늘었지만, 노르웨이(39.5%)·스웨덴(27.3%)·핀란드(24.5%)·남아프리카공화국(15.8%)·미국(15.7%) 등 선진국에 턱없이 못 미친다.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 대기업의 실상은 더욱 초라하다. 한 예로 삼성 임직원 21만 명 가운데 여성인력은 5만6천 명으로 27%를 차지하지만, 전체 임원 1760명 중에서 여성은 34명(1.9%)에 불과하다. 삼성의 간판인 삼성전자는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위상이 부끄러울 정도다. 삼성전자의 여성 임원 비율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1.1%(13명)에 그친다. 다른 재벌그룹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더 열악한 곳도 적지 않다. 이런 재벌 대기업의 실정은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이나 합작기업과도 큰 차이를 보인다. 한 예로 유한킴벌리의 여성 임원 비율은 지난해 말 기준 16~17%에 이른다.

여성 인력 방치는 국가적 손실

재벌 대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이 낮은 것은 ‘남자는 밖에서 일하고, 여자는 가정을 지킨다’는 유교적 기업문화의 영향이 크다. 현대그룹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을 비롯해 상당수 재벌 총수들은 집안 여자들이 경영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범현대가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배경 중에는 시아버지의 유지를 거스르고 여자가 경영 일선에 나섰다는 이유도 있다.

재벌 대기업의 낮은 여성 임원 비율은 사회 전체의 발전 추세보다 뒤떨어진 후진성을 보여준다. 여성의 전문직 진출을 살펴보면 치과의사 4명 가운데 1명이 여성이고, 여성 한의사 비중도 16.4%에 이른다. 초등학교 교사는 4명 가운데 3명이 여성이고, 대학교수 중 여성 비율은 21.1%에 이른다. 행정고시의 여성 합격자 비율은 47.7%, 사법시험은 41.5%로 절반에 육박한다. 외무고시는 여성이 55.2%로 남성이 소수자로 전락한 지 오래다.

“아유~, 속 보여.”

금융권의 한 여성 임원은 “대기업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삼성이 갑자기 ‘여성 CEO’를 들고 나온 이유가 뭐겠느냐”고 되물었다. 사회 일각에서는 이건희 회장의 두 딸을 위한 사전 포석 내지 배려로 해석한다. 이부진 호텔신라 겸 삼성에버랜드 사장이 오빠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을 제치고 삼성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까지 열어둔 조처가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더 큰 틀에서 보면 이건희 회장의 ‘여성 CEO’ 발언은 결국 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삼성이 ‘고급 여성인력 양성’을 말뿐이 아니라 내실 있게 실행하도록 격려와 독려를 할 필요가 있다. 이 회장의 여성인력 중시 발언은 비단 이번만은 아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채용이나 승진에서 불이익을 준다면 당사자가 겪게 될 좌절감은 차치하더라도, 기업의 기회 손실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다른 나라는 남자·여자가 합쳐서 뛰는데 우리는 남자 홀로 분투하고 있다. 인적 자원의 국가적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이 회장은 1990년대부터 여러 자리에서 여성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삼성이 여성인력의 채용을 획기적으로 늘리려고 1993년과 1994년 일반 공채와 별도로 ‘여성 전문직 공채’를 대대적으로 시행한 것도 이런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한 해 수백 명씩 삼성에 입사한 대졸 여성들은 현재 임원 예비후보군을 이루고 있다.

정말로 이번엔 ‘유리천장’ 뚫리나

재벌 대기업의 여성인력 양성은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 발전에도 절실하다. 우수 여성인력을 적극 활용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지 않으면 선진국 진입의 길이 요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지난해 ‘여성 경제활동참가율’(15~64살 여성 중에서 직업이 있거나 구직활동을 하는 여성의 비율)은 49.4%에 그친다. 이는 남자들의 73%와 큰 차이를 보일뿐만 아니라 선진국의 여성 경제활동참가율(65% 수준)에도 크게 못 미친다.

남자들에 뒤지지 않는 자질과 능력을 갖고 있는데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에 막혀 직장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여성 인재들이 있다. 삼성만 하더라도 외환위기 직후 그룹 차원에서 대대적인 감원을 할 때 애써 뽑은 경력 5년차 전후의 고급 여성인력이 대거 희생양이 된 뼈아픈 경험이 있다. 이건희 회장의 ‘여성 CEO‘론은 더 이상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이나 상생협력처럼 헛구호가 돼서는 안 된다. 이제는 ‘왕의 여자들’이 아닌 ‘보통 여자들’도 당당히 CEO가 되어야 할 시대가 됐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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