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이건희 친정체제는 ‘노욕’인가?

일흔에 비리 적발 내세워 경영 전면에 다시 나선 이건희 삼성 회장…물러날 때를 놓쳤던 ‘정주영의 길’과 넘겨줄 때를 알았던 ‘구자경의 길’ 중 어디로 가나
등록 2011-07-01 13:03 수정 2020-05-03 04:26

‘한국 경제를 이끄는 은둔의 황제’.
몇 년 전 미국의 한 시사주간지가 이건희 삼성 회장을 표지인물로 다루며 붙인 제목이다. 이 회장의 경영 스타일은 일상적인 경영을 일일이 챙기는 다른 재벌 총수들과는 다르다. 일상 경영은 전문경영인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한남동 자택(승지원)에 칩거한 채, 그룹경영의 큰 화두와 방향을 제시해왔다.

계산된 가신 그룹 무력화 작전?

»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6월 일본을 방문하려고 김포공항 출국장을 찾았다. 그의 뒤로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모습이 보인다. 연합

»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6월 일본을 방문하려고 김포공항 출국장을 찾았다. 그의 뒤로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모습이 보인다. 연합

하지만 이제 이건희 회장은 더 이상 ‘은둔의 황제’라는 별칭이 어울리지 않게 됐다. 그는 지난 4월 말부터 해외 출장 등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매주 화·목요일 두 차례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으로 출근해서 그룹경영을 직접 챙기고 있다. 지난 6월8일 삼성 사장단회의에서는 김순택 미래전략실장을 통해 “그간 삼성의 자랑이던 깨끗한 조직문화가 훼손됐다”며 삼성테크윈의 비리를 강하게 질타했다. 다음날에는 출근하면서 스스로 기자들을 불러모아 “테크윈뿐만 아니라 삼성 전체에 부정부패가 퍼져 있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지난 6월21일 일본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면서는 “계속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1년이 걸릴지, 2년이 걸릴지 해봐야 안다”고 덧붙였다. 이 회장의 경영 스타일이 ‘은둔형’에서 경영 전면에 나서 직접 챙기는 ‘친정체제형’으로 180도 바뀐 것이다.

이 회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삼성테크윈의 사장·전무·상무가 무더기로 회사를 떠나고, 그룹 사령탑인 미래전략실의 감사팀장과 인사팀장도 사실상 문책성 교체가 이뤄졌다. 삼성카드의 최고재무책임자도 또 다른 내부 비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감사 조직을 강화하라는 이 회장의 지시를 좇아, 각 계열사 감사 부서의 책임자를 교체하고 인력을 늘리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한여름인데도 삼성 전체에 찬바람이 쌩하니 불며 임직원들이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다.

주목할 것은 삼성테크윈이나 삼성카드와 같은 부정·비리 사례가 과거 삼성 안에서 전혀 없었던 게 아니라는 점이다. 계열사의 한 고위 임원은 “친정체제에 나선 이 회장으로서는 무엇인가 변화와 성과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라며 “테크윈이나 카드 사태는 일종의 시범 케이스에 걸린 것으로 봐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 회장의 최근 행보가 단순히 계열사 비리에 대한 분노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미리 치밀하게 계산된 행위이거나 숨겨진 배경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럼 이 회장의 분노에 숨은 의도나 배경은 무엇일까? 삼성 안팎에서는 이와 관련해 지난해 말 동반 퇴진한 옛 가신 그룹의 비리적발설, 그림 거래를 통한 비자금 조성 혐의로 구속된 오리온그룹 총수 일가의 불똥이 삼성으로 튀는 것을 막으려는 선제조처설, 삼성 3세들인 이재용·이부진 사장으로의 경영권 승계를 원활히 하려는 인적정리목적설 등 몇 가지 얘기가 나온다. 특히 옛 가신 그룹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내용까지 흘러나온다. 삼성의 한 관계자는 “이 회장이 삼성 특검 수사로 2008년 경영 퇴진을 한 뒤, 가신 그룹이 외부 노출 위험성을 핑계로 경영 보고를 중단하고, 자신들은 이전과 똑같이 실권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삼성 관계자는 “이 회장이 딸인 이부진씨에게 삼성의 주요 계열사를 점검하도록 해서 옛 가신 그룹의 비리와 전횡을 확인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심지어 옛 가신 그룹이 이 회장과의 갈등 과정에서 회장 일가의 약점을 잡고 거액을 요구했다는 드라마 같은 얘기까지 나돈다.

후계 정리 늦어지면 불확실성 커져

이런 내용들의 사실 여부는 확인이 안 되지만, 이 회장과 옛 가신 그룹 간 갈등은 단순히 설만은 아닌 듯싶다. 삼성은 지난해 12월 사장단 인사 때 이학수 부회장 등 옛 가신 그룹의 동반 퇴진을 전격 발표하며 “문책성 인사”라고 밝혔다. 이런 설명은 이 회장의 직접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시 삼성은 구체적인 문책 이유를 밝히지 않아 궁금증을 키웠다. 최근 삼성 안팎에서 나도는 얘기가 사실이라면 자연스럽게 설명되는 셈이다. 삼성은 공식적으로는 펄쩍 뛰며 부인한다. 미래전략실 관계자는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라고 일축했다.

한국의 재벌은 총수의 절대 권한과 경영권 세습 등의 특성 탓에 ‘왕조’에 비유된다. 과거 봉건왕조에서는 왕권과 신권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이학수 전 부회장은 14년간 구조조정본부장(현 미래전략실장)을 맡아 이건희 회장의 대리인 노릇을 하며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왕조의 재상에 비유될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비자금, 차명계좌, 경영권 세습 등 총수 일가의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가신 그룹을 이 회장도 함부로 정리할 수 없으리라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삼성 특검으로 이 모든 쟁점에 대한 사법 처리가 일단락되자, 옛 가신 그룹의 몰락이 뒤따랐다.

이 회장의 친정체제는 과거처럼 믿고 맡길 수 있는 대리인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삼성 사령탑의 새로운 책임자인 김순택 미래전략실장이 뛰어나다고 해도, 전임자인 이학수 부회장과는 중량감에서 차이가 난다. 삼성 계열사의 한 고위 임원은 “이 회장이 직접 챙겨봐야겠다는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경영의 큰 방향을 제시하자, 삼성 전체가 회장의 지휘봉을 따라 신속히 움직이고, 삼성 전체가 팽팽한 긴장 속에 빠져드는 모습은 그의 절대적 영향력과 리더십을 재확인시켜준다. 삼성의 한 임원은 “이 회장이 마치 1993년 신경영 선언을 했던 때와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건희 친정체제’는 리스크도 안고 있다. 삼성이 지난해 말 사장단과 임원 인사에서 대규모 세대교체를 단행하고, 이 회장의 자녀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를 사장으로 동반 승진시킬 때만 해도 경영권 승계가 빨라질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이 회장이 올해로 고희(70살)를 맞는 고령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하지만 이 회장의 친정체제가 급부상하자 상황은 정반대로 바뀌었다. 더구나 삼성은 아직 후계 구도조차 분명치 않다. 오누이 간 후계 경쟁이 치열하다. 이 회장이 고희를 넘긴 시점에서 친정체제를 고수하고, 후계 구도 정리를 계속 미룰 경우 삼성은 예기치 못한 불확실성에 직면할 수 있다.

정주영 현대 회장의 사례는 좋은 본보기다. 정 회장은 한국 제1의 현대그룹을 일구었지만, 말년까지 후계 구도를 정리하지 못하다가 고령으로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아들 간의 ‘왕자의 난’과 그룹 위기를 자초했다. 옛 현대그룹 출신 관계자는 “왕회장이 정신이 맑지 않은 상태에서 어제는 이 아들 편을 들었다가, 오늘은 저 아들 편을 들며 오락가락하다가 결국 골육상쟁의 비극이 초래됐다”고 말했다. 반면에 구자경 LG그룹 회장은 지금의 이 회장 나이인 고희 때 명예회장으로 물러나며 아들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는 ‘지혜’를 발휘했다.

안팎으로 잠복한 불안 요소

우리가 삼성 내부와 이건희 회장 가족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삼성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비중이 그만큼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제 삼성의 변화는 좋든 싫든 국민에게 영향을 끼치는 시대가 됐다. 절대왕조는 본질적으로 왕이 죽어야 승계가 이뤄진다. 재벌은 왕조와 속성이 비슷하다. 재벌이 절대왕조처럼 기반이 튼튼할 때는 왕의 갑작스러운 공백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삼성은 애플 같은 글로벌 선도기업과의 경쟁, 차세대 성장 동력 확보 등 사업적으로나 지배구조상으로 거센 도전과 불확실성을 안고 있다. 더구나 이 회장을 견제할 가신 그룹의 힘도 미약한 상태다.

우리 사회에는 삼성의 경영권 세습에 여전히 부정적 시각이 존재한다. 하지만 삼성 특검과 삼성에버랜드 재판이 일단락된 현 시점에서는, 후계 구도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선택일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은 ‘정주영의 길’과 ‘구자경의 길’ 중에서 과연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jskwa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