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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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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2인자의 부침, 권력무상 혹은 데자뷔

‘이 회장의 복심’ 이학수 지고 김순택 미래전략실장 떠올라…

경영 승계 과도기에서 3세 간 갈등 조정 역할 관측
등록 2010-12-08 17:10 수정 2020-05-03 04:26

삼성의 이건희 회장과 김순택 미래전략실장(부회장) 간에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김 부회장은 1990년대 초 이건희 회장이 친정체제를 구축하는 데 숨은 공신이다. 이 회장은 부친인 이병철 회장의 사망으로 1987년 말에 회장으로 취임한다. 하지만 선대 회장 가신그룹의 힘은 건재했다. 그 중심에는 1978년 이후 13년간 회장 비서실장을 맡으며 삼성의 최대 실세로 불린 소병해씨가 있었다. 당시 비서실에 근무하던 김 부회장은 30대 후반에 이사로 승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삼성의 한 임원은 “김 부회장은 소 실장으로부터도 신임이 두터웠는데, 이 회장은 소 실장의 약점을 잘 아는 김 부회장에게 소 실장 라인을 정리하는 임무를 맡겼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 회장 친정체제 구축 공신

이건희 회장과 김순택 부회장, 이학수 전 부회장, 이재용 사장(왼쪽부터)이 2006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평판디스플레이 전시회를 둘러보고 있다.연합

이건희 회장과 김순택 부회장, 이학수 전 부회장, 이재용 사장(왼쪽부터)이 2006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평판디스플레이 전시회를 둘러보고 있다.연합

이 회장이 20년 만에 김 부회장을 다시 불렀다. 자리는 새로운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의 책임자다. 이 회장은 동시에 옛 컨트롤타워의 수뇌부였던 이학수 전 부회장과 김인주 전 사장을 삼성물산과 삼성카드의 고문으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이는 과거 컨트롤타워의 부정적 이미지와 관행에 대한 문책이라고 밝혔다. 이 전 부회장은 1997년 이후 14년간 회장 비서실장, 구조조정본부장, 전략기획실장 등을 역임하며 삼성의 2인자로 군림했다. 컨트롤타워는 물론 주요 계열사 최고경영진에는 그의 인맥이 구축됐다. 이 회장으로서는 삼성의 3세 체제 전환을 위해서는 이 전 부회장 라인에 대한 정리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삼성의 한 임원은 “이 회장은 과거 소병해씨를 정리한 경험이 있는 김 부회장이 이학수 부회장의 정리에도 적임자라고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전 부회장 라인의 정리는 지난 12월3일 삼성 사장단과 미래전략실 인사에서 가시화됐다. 이학수 라인으로 불리던 일부 전략기획실 핵심 인사들과 계열사 최고경영진들이 물갈이됐다. 삼성전자 최고재무책임자를 지낸 최도석 삼성카드 부회장, 전 구조본 재무팀장이었던 유석렬 삼성토탈 사장, 전 전략기획실 재무팀장이었던 최광해 부사장 등이 모두 퇴진했다.

김순택·이학수 두 부회장의 궤적은 기업권력의 무상함이 정치권력에 못지않음을 보여준다. 김 부회장은 회장 비서실에서 운영팀장, 비서팀장, 경영관리팀장을 지내며 승승장구하다 1993년부터 비서실 밖으로 밀려났다. 삼성전관 기획관리본부장을 잠깐 맡다가 해외연수를 나갔다. 해외연수는 대개 퇴직 준비 과정으로 인식된다. 이후 삼성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지만 수년간 제대로 된 보직을 맡지 못했다. 1997년 이후 삼성중공업 부사장과 미주본사 대표를 맡았지만 한직이었다. 그렇게 잊혀지는 것 같던 그가 1999년 삼성SDI 대표이사로 오뚝이처럼 되살아났다. 그의 기사회생과 관련해서는 흥미로운 두 가지 뒷이야기가 있다. 삼성의 한 임원은 “김 부회장을 잊지 않고 있던 이 회장이 어느 날 갑자기 ‘순택이는 요즘 뭐하냐’고 찾아 다 죽어가던 김 부회장이 살아났다는 얘기와, 김 부회장이 당시 실세인 이학수 부회장에게 직접 충성서약을 하고 살아났다는 얘기가 돌았다”고 말했다.

 

이부진씨도 사장 승진, 승계구도 두 트랙으로

‘이건희 회장의 복심(腹心)’ ‘삼성의 2인자’ ‘삼성의 글로벌 전략을 지휘하는 총사령관’.

이학수 전 부회장을 가리키던 화려한 수식어들이다. 삼성의 회장 비서실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59년으로, 그동안 모두 12명이 실장 자리를 거쳐갔다. 이 전 부회장의 비서실장 재임 기간은 14년으로 전임자들의 평균치인 3.5년의 4배에 달한다. 이 회장 입장에서 이 전 부회장의 가장 큰 공적은 뭐니뭐니 해도 세금 부담 없이 아들인 이재용씨로의 경영권 세습을 이루어낸 것이다. 재용씨의 재산은 현재 2조원을 육박한다. 하지만 그가 낸 세금은 국세청이 부과한 증여세를 포함해도 수백억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의 이런 혁혁한 공도 퇴진을 막지는 못했다. 이 회장은 비자금 사건으로 법정에 서는 곤욕을 치렀지만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이 됐다. 족쇄 같던 경영권 세습 문제에 대해 사실상 면죄부를 받았기 때문이다. 삼성의 한 임원은 “이학수 부회장의 나이(64살)로 볼 때 은퇴 시기가 됐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이 전 회장이 경영권 세습에 대해 면죄부을 받은 것이 역설적으로 이 부회장의 퇴진을 앞당긴 측면도 있다”면서 “이 회장이 더 이상 이 부회장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부회장이 과거 실장들처럼 예우를 받지 못한 것도 뜻밖이다. 전임 실장인 이수빈·현명관씨는 각각 삼성생명과 삼성물산의 회장으로 명목상 깎듯한 대접을 받았다.

김순택 부회장의 역할은 삼성의 경영을 2세 체제에서 3세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과도기 관리다. 이를 위해 그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부여됐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앞서 말한 이학수 부회장의 잔재 정리다. 나머지는 이건희 회장의 자녀들인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과 이부진 호텔신라·삼성에버랜드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 간의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이다. 삼성 안팎에서는 지금까지 이건희 이후 이재용 체제로의 전환을 당연시해왔다. 하지만 이번 사장단 인사로 인해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여동생인 이부진씨가 호텔신라와 삼성에버랜드 사장으로 승진하고, 삼성물산 상사부문 고문까지 겸하게 됐기 때문이다. 삼성 3세 체제로의 승계 구도가 이재용씨 단일 트랙이 아니라 이재용·이부진씨의 두 트랙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새로운 그룹조직인 미래전략실은 과거의 컨트롤타워와 얼마나 다를까? 삼성은 과거 그룹 컨트롤타워의 부정적 이미지와 관행을 씻어내고 새 조직으로 출범할 것임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베일이 걷힌 미래전략실의 조직은 경영지원(재무), 전략1·2, 커뮤니케이션, 인사, 경영진단(감사) 등 6개 팀으로 과거와 별 차이가 없다. 김순택 부회장과 팀장 등 7명의 고위 임원 중에서 과거 컨트롤타워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인사가 6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굳이 변화가 있다면 지나치게 비대화된 재무팀을 약화시키고, 대신 계열사 관리와 기획을 담당하는 전략팀을 신설한 정도다. 삼성도 이를 의식한 듯 조직보다도 운영에서 과거와 다른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룹 콘트롤타워라는 미래전략실의 본질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는 크지 않을 것이다. 삼성이 변화를 강조하는 것은 그룹 컨트롤타워의 부활에 대한 비판을 무마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미래전략실은 과거와 달라질까

삼성은 비자금 사건 이후 경영 쇄신을 내걸며 이건희 회장 퇴진, 전략기획실 해체 등을 선언했다. 하지만 3년 만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과거로 회귀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삼성의 기업지배구조, 이건희 회장의 황제경영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삼성은 그룹조직 부활, 이학수 부회장 퇴진, 김순택 부회장 기용이 모두 이건희 회장의 지시라고 발표했다. 이 회장의 공식 직함은 삼성전자 회장이다. 하지만 대표이사나 등기이사가 아니어서 법적 대표성이 없다. 이 회장은 그 밖에도 이재용씨의 사장 승진, 사장단 물갈이, 그룹조직 부활과 사장단 인사 조기 실시 등의 지시도 거리낌없이 했다. 삼성 계열사의 인사권은 주주총회나 이사회의 몫이다. 아무런 법적 권한이 없는 이 회장의 독단으로 이들의 권리는 철저히 무시됐다. 하지만 한국 언론은 아무런 비판 없이 ‘이재용 시대’ 띄우기에만 매달렸다. 권한-책임의 불일치는 경영 능력의 검증 없이 경영권을 세습하는 것과 함께 후진적 재벌지배구조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삼성의 컨트롤타워가 비판 받는 이유도 법적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계열사에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삼성이 그룹 컨트롤타워를 쇄신할 의지가 있다면 이름과 사람만 바꾸는 데서 그칠 게 아니라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 등을 통해 권한-책임의 일치, 의사결정 과정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삼성은 또다시 상황에 따라 몸 색깔만 바꾸는 카멜레온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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