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시집에만 상을 주나요, 이영광의 ‘동쪽 바다’를 ‘올해의 결구상’으로 추천합니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
수많은 문학상이 있다. 대개는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다. 바로 그게 문제다. 늘 받을 만한 사람이 받다니, 이럴 수가, 이렇게 지루할 수가. 불만은 또 있다. 왜 심사의 대상은 늘 ‘한 편의 작품’일까. 예컨대 이런 식은 어떤가. 올해의 제목상, 올해의 도입부상, 올해의 여성 캐릭터상, 올해의 묘사상, 올해의 아포리즘상 등등. 물론 작품이라는 것이 분리 불가능한 유기체인 줄은 잘 알고 있지만, 1등만 뽑는 시상식의 상상력이 하도 따분해서 하는 소리다.
이영광의 두 번째 시집 (랜덤하우스코리아·2007)를 읽었다.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견고한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이를테면 유배된 선비의 순결성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아름답고 견고하지만, 좀체 틈을 주지 않는 그 염결성이 다소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다 읽은 한 편의 시에는 드물게도 쓸쓸한 투정 같은 것이 배어 있어서 외려 그게 마음을 끌었다.
“동쪽 바다로 가는 쇳덩이들,/ 짜증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붕붕거린다, 꽁무니에 불을 달고// 이 지옥을 건너야 極樂 해변이 있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동해로 가는 차들의 행렬. 교통체증이 심했던지 ‘짜증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차들이 악다구니 중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시인은 ‘지구는 공사 중’이라고 투덜거리며 찻집으로 길을 낸다. 찻집 벽에는 고구려 벽화가 그려져 있고 시인은 ‘당신’에게 편지를 쓰듯 읊조린다. “뉴 밀레니엄은 어쩌면 벽화의 시대로 남지 않을까요.” 이어지는 내용이다.
“폭탄 세일과 재탕 우주 전쟁과 기본 삼만 원을/ 숙식 제공과 月下의 도우미들과/ 흡반 같은 골목을 거느린 벽의 이면,/ 벽화는 모든 벽을 은폐해요/ 모든 벽화는 春畵예요// 세상은 궁극적으로 형장이고/ 인간은 인간의 밥이고/ 에로가 어쩔 수 없이 애로이듯/ 이건 苦行이야, 마시고 싶어 마시는 게/ 아니야, 하고 내가 주정했을 때/ 당신은 암말 없었죠 블라인드 너머/ 오색의 길을 오색의 길을 오색의 길을/ 보고 있었죠 이 지구는 어쩌면/ 버려진 별이 아닐까, 신음하듯.”(‘동쪽 바다’에서)
시인은 “벽화는 모든 벽을 은폐해요”라고 적었다. 우리는 이렇게 읽었다. 이제 주위의 모든 벽들은 죄다 광고판이다. 그것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벽화쯤 될 것이다. 그 벽화들은 초자아를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욕망들을 음란하게 드러낸다. “모든 벽화는 춘화(春畵)예요.” 게다가, 벽화가 벽을 감추듯, 우리 시대의 춘화들은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곳곳의 ‘벽’들을 용케 감춘다. 그걸 알기 때문에, 고행하듯 술을 마시고, 버려진 별을 보듯 지구를 본다.
“돈 내고 받아드는 영수증처럼 허망한 당신의/ 오랜 병력과 어둠과 온몸이 부서질 듯한 체념을/ 가슴으로 한번 받아볼까요 나는 잘못/ 살았어요 살았으니까 살아 있지만/ 당신과 못 만나고 터덜터덜 가는 길에/ 동쪽 바다 물소리 푸르게 들리고,/ 내가 밤하늘 올려다보며 당신 생각을 할까요/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두루미처럼 울까요/ 당신은 좆도 몰라요”
같은 시의 끝부분이다.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는 길에 잃어버린 유토피아처럼 동쪽 바다 푸른 물소리가 들린다. 같은 시의 다른 대목에서 시인은 “요컨대 인간은 전쟁 중이죠“라고 적었다. 말하자면 그에게 2000년대는 ‘지구는 공사 중, 인간은 전쟁 중’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 구절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잘못 살았다, 잘못 살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라는 시인의 자조에도, 그의 저 쓸쓸한 귀가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진짜 매력은 이런 근엄한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정 부리듯 늘어놓는 말들의 쓸쓸한 율동에 있다. 자학인 듯 가학인 듯 이어지던 말들이 제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무너진다. “당신은 좆도 몰라요.” 세상과의 불화가 그리움을 키우고, 너무 큰 그리움은 때로 화를 키운다. 욕설이 이렇게 물기를 머금을 수도 있구나. 이 시를 ‘올해의 결구(結句)상’ 후보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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