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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셋값과 집값이 멀어질 때

등록 2007-05-11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막연한 기대 심리 때문에 벌어지는 차이, 지금의 상황은 거품 터지던 1991년과 비슷</font>

▣ 정남구 한겨레 논설위원 jeje@hani.co.kr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길에서 100달러 지폐를 발견했다면 주워야 할까? 경제학자들이 ‘기회비용’ 개념을 설명할 때 흔히 드는 사례다. 그가 돈을 줍는 데 드는 시간 동안 다른 일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기회비용이다. 빌 게이츠가 회장으로 일하는 동안 받은 연봉은 10만달러 가량이었다. 한해 2천 시간을 일한다면 1분에 8.3달러 꼴이다. 천하의 빌 게이츠라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100달러 지폐를 줍는 것이 기회비용 면에서 현명한 선택인 셈이다.

앞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임대료를 합친 값

집을 살 것인가, 임대해서 살 것인가를 결정할 때도 기회비용 논리로 생각해볼 수 있다. 서울 강남구의 아파트는 2007년 1월 현재 전셋값이 집값의 평균 37.2%다. 10억원짜리 집이라면 3억7200만원에 전세로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집을 임대 대신 내집으로 들어가 살려면 6억2800만원을 추가로 지출해야 한다. 그 돈을 연리 6%로 조달한다면 연간 3768만원의 이자 부담을 져야 한다. 여기에다 적잖은 보유세도 내야 한다. 결국 해마다 4천만원씩 집값이 쉼없이 올라야 겨우 본전이다. 갖고 있던 집의 값이 오른 것이라면 몰라도, 그런 집을 일부러 사는 것은 현명한 선택일지 의문이다. 전셋값에 견줘 집값이 너무 비싸 ‘소유’의 기회비용이 너무 큰 탓이다.

“집값이 떨어지는 것 봤어?” 많은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집을 제때 사지 않았다가 낭패를 봤을 때, 주변 사람들이 부동산으로 큰돈을 버는 것을 보았을 때, ‘부동산 불패 신화’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더욱 깊이 뿌리를 내린다. 믿음이 신앙 수준이 되면, 지난날 집값이 큰 폭으로 떨어졌던 기억도 쉽게 잊어버린다. 하지만 실제 집값이 떨어진 역사가 있다. 국민은행(옛 주택은행)의 전국 주택가격동향조사 결과를 추적해보자. 1987년 3월부터 91년 4월까지 전국 아파트값은 무려 128%나 폭등했다. 서울도 126% 올랐다. 그러나 오르는 데도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이후 93년 12월까지 1년8개월 사이 전국 아파트값은 고점 대비 16.3%, 서울은 19.7%가 떨어졌다. 거품이 꺼질 때는 집값도 급락한다. 만고불변의 이치다.

“집값은 계속 오른다”는 경험칙은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사고의 함정이다. 건물은 낡으면 점차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집이 낡아가는데도 ‘집값’은 계속 오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건물가치가 떨어지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땅값이 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적률이 낮게 지어진 도심의 재건축 대상 아파트는, 건물은 거의 쓸모가 없는데도 땅의 가치가 커서 집값이 엄청 비싸다. 반면 지방 중소도시의 아파트값은 대도시와는 움직임이 조금 다르다. 신규 아파트값이 비싸고, 아파트가 낡아가면 값이 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건물가치 하락 속도가 땅값 상승 속도보다 빨라서다. 집값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은 땅값이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집값이란 그 집을 다른 사람에게 임대해줘서 앞으로 받을 수 있는 모든 임대료를 현재가치로 바꾼 것이다. 올해치 임대료에다, 1년치 이자를 뺀 내년치 임대료, 2년치 이자를 뺀 내후년치 임대료 등을 모두 합치면 이론상 집값이 된다. 만약 임대료가 앞으로 오르지 않고 해마다 똑같다면 집값은 전셋값과 같아야 한다. 하지만 집값이 전셋값보다 비싼 것은 임대료 자체의 상승이 계산에 반영돼 있어서다. 임대료 상승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집값과 전셋값의 차이는 벌어진다. 또 이자율이 계속 낮아지는 경우에도, 앞으로 받을 임대료의 현재가치가 커져 집값과 전셋값의 차이가 커진다. 이런 이치에 따라, 전셋값과 매맷값의 비율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살피면 집값의 큰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전셋값이 오르고, 집값이 뒤따르는 게 정상 경로

집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 임대료(전세)가 먼저 오르게 된다. 이어, 임대료 수입 증가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되면서 집값 상승이 일어난다. 전셋값이 빠르게 오르고, 집값이 천천히 뒤따르는 동안 전셋값과 매맷값의 차이는 줄어든다. 이것이 정상적인 집값 상승 경로다. 집을 사는 것이 현명한 때가 바로 이 시기다. 전셋값에 조금만 더 보태면 집을 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부동산시장도 주식시장처럼 때로 정상 경로를 이탈하곤 한다. 임대료는 더 이상 오르지 않거나, 임대료 상승률이 미미할 것으로 보이는데도, 집값이 마구 오르는 때가 있다. 막연한 집값 상승 기대 심리가 사람들의 머릿속을 점령하면서 전셋값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집값이 오르는 것이다. 전셋값과 집값의 차이는 자꾸 벌어진다. 거품이 터질 때까지.

1998년부터 우리나라의 전셋값과 집값은 모두 올랐다. 처음엔 전셋값이 아주 빠르게 오르고 집값이 그 뒤를 따라갔다. 국민은행이 집계하는 아파트 전세가격/매매가격 비율을 보면, 전셋값은 1998년 매맷값의 50.8%에서 2001년 68.9%까지 올랐다. 주택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 시절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1년을 경계로 상황이 뒤바뀌었다. 이후 전셋값은 완만하게 오르고 있는데, 집값은 아주 가파르게 올랐다. 전셋값과 집값의 차이는 계속 벌어졌다. 전국 평균 전셋값은 2004년에는 매맷값의 57.2%, 2007년 1월엔 54.3%까지 떨어졌다. 서울은 더하고, 서울에서도 강남권이 더 심하다. 지금 우리나라의 집값 상황은 1991년과 너무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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