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6일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3주기를 맞아 원전과 경남 밀양의 송전탑 문제를 알리러 거리에 나섰다. 서울역 부근에서 시민들에게 호소도 하고 유인물도 배포하려는데 날을 잘못 잡았는지 날씨가 너무 추웠다. 그래도 막 시작하려는 참에 익숙한 얼굴이 지나간다. 밀양 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의 이계삼 선생이다. 서울에 회의 때문에 오던 길이라고 한다. 옛말이 틀린 게 없다. 밀양 송전탑 문제를 알리려 하는데 당사자가 나타났으니 신기한 일이다.
잊혀지는 밀양 송전탑이계삼 선생을 얼른 보내드리고 유인물을 배포하는데, 할머니 한 분이 유인물을 안 받겠다고 하며 ‘국가가 하는 일인데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참 국가주의의 뿌리가 깊다. 그러나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다. 할머니를 따라가며 “그런데 수명이 끝난 원전인 고리1호기 하나만 폐쇄해도 밀양 송전탑이 필요 없다는 걸 아세요?”라며 말을 붙인다. 순간 할머니가 관심을 보이신다. “그게 무슨 말이여?”
그래서 다시 한번 “낡은 원전하고 밀양 송전탑이 연결돼 있습니다. 낡은 원전만 폐쇄하면 밀양 송전탑은 필요 없습니다”라고 설명한다. 할머니 표정을 보니, ‘그럴 리가 없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헷갈려하시는 모습이다. 그러나 곧 할머니는 “그래도 난 국가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건 싫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재빨리 “가시는 길에 이걸 읽어봐주세요. 자세히 나와 있으니까”라고 말하며 유인물을 건네니, 이번엔 받으신다. 유인물 한 장을 건네는 데 3~4분이 걸린 셈이다. 참 수공업적인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1시간 동안 몇 명에게 우리 얘기를 전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밀양의 최근 상황은 매우 힘들다. 한전은 최근 개별보상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뿌리며, 주민들을 분열시키고 힘들게 하고 있다. ‘지금 합의하면 돈을 주지만, 나중에는 돈을 안 준다’며 주민들을 협박한다. 그러다보니 한 마을 안에서도 개별보상금을 받자는 주민들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주민들 간에 갈등이 일어난다. 한전은 뒤에서 이런 갈등을 즐기고 있다. 이런 한전의 행태를 제어할 곳이 없다. 밀양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대부분의 언론과 정치권은 밀양에 무관심하다. 밀양은 잊혀지고 있다.
3월10일에는 밀양의 이계삼 선생이 또 서울에 왔다. 지난해 12월6일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분의 유가족과 함께 상경, 1인시위를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날 아침 보라마을에 공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보라마을은 2012년 1월에 먼저 목숨을 끊으신 분이 살던 마을이다. 그래서 을지로입구 한전 서울본부 앞에서 만난 이계삼 선생님은 경황이 없다.
6·4 지방선거와 밀양이날 녹색당의 서울·경기 지역 기초지방자치단체장 후보, 지방의원 후보들은 ‘밀양을 위한 약속’이라는 정책을 발표했다. 밀양의 초고압 송전탑 같은 문제를 겪지 않으려면, 수도권부터 전기 소비를 줄이고 재생 가능 에너지를 늘려나가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계삼 선생은 이런 약속을 하는 정당과 후보자가 늘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여전히 개발 공약이 판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역 주민들의 삶이 나아지는 것도 아닌데, 여전히 기득권 정치인들은 ‘개발’과 ‘성장’만이 표가 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일본에서는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지난 1월19일 오키나와의 나고시에서 시장선거가 있었는데, 미군기지 건설 반대를 공약한 이나미네 스스무 후보가 당선됐다. 나고시는 일본 정부와 미군이 새로운 미군기지를 건설하려는 장소다. 일본 중앙정부는 이번 선거에서 미군기지에 찬성하는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강력하게 지원했다. 미군기지만 받아들이면 761억엔을 지원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찬성 쪽 후보의 홍보물에는 후보의 사진이 아닌 아베 신조 총리의 사진이 실릴 정도로 노골적인 지원을 했다.
그런데도 미군기지 반대쪽 후보가 당선된 것은 ‘공공사업을 벌여봐야 지역에 희망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주민들이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이다. 토건사업을 벌여봐야 지역경제가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그래서 반대쪽 후보는 1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지역 진흥 정책을 내걸었고 이런 정책으로 당선된 것이다.
나고시의 사례는 기존 개발 방식에 대한 회의가 일본에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토목사업뿐만 아니라 원전에 대한 회의도 확산되면서 재생 가능 에너지를 지역의 비전으로 삼는 곳도 나타나고 있다. 나가노현 이이다시는 태양광발전과 소수력발전을 지역의 핵심 의제로 삼고 있고, 홋카이도 시모카와초는 목재를 활용해 2018년까지 100% 에너지 자립을 이루려고 한다.
이런 변화가 대한민국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 지역부터 에너지 전환을 이뤄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밀양을 위한 약속’이다. 송전탑 문제의 근본 원인은 발전소와 소비지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원전은 바닷가에 짓고 전기 소비는 대공장과 대도시가 하니, 그 사이를 송전선으로 잇는 것이다. 만약 지역마다 에너지 자립도를 높여나간다면, 장거리 초고압 송전선을 새로 건설할 필요가 없다. 원전 같은 대규모 발전소도 더 이상 안 지어도 된다.
곳곳에서 ‘밀양을 위한 약속’ 퍼져나가길지속 가능한 에너지는 나를 위한 것이고, 내가 사는 지역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지역에 일자리도 생긴다. 집집마다 태양광 전지판이 설치되면 그것을 관리할 사람도 필요하고, 고장이 나면 수리할 사람도 필요하다. 건물과 가게가 에너지를 줄이도록 컨설팅하는 직업도 생길 것이다. 에너지 관련 제품을 취급하는 에너지 슈퍼마켓도 필요할 수 있다. 학교 건물 옥상마다 태양광 전지판이 설치되면 학교에서 전기요금 걱정을 덜 해도 된다. 이렇게 해야 원전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탈원전을 추진하는 독일에서는 에너지 자립을 하려는 도시가 꾸준히 늘어왔다. 그것이 탈원전의 기반이 되었다.
변화가 일어나려면 이번 지방선거가 중요하다. ‘밀양을 위한 약속’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가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원전에서 출발하는 765kV 초고압 송전선’이라는 괴물과 싸워온 밀양 주민들에게 우리가 예를 표하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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