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경우가 다 있나 싶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구성된 토론그룹이 있다. 토론을 하다가 입장이 양쪽으로 갈리자, 각자의 입장을 정리한 초안을 써와서 쟁점토론을 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한쪽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파일을 통째로 받아서 마치 자신이 쓴 것처럼 베낀 초안을 냈다. 반면 다른 한쪽은 나름대로 자료를 검토하고 분석해서 독자적인 내용을 제출했다.
베낀 것 들통 나자 표결하자 밀어붙여
회의에서 베낀 것이 들통 나자, 베낀 쪽은 다수결로 표결을 하자고 밀어붙였다. 다수결 표결이 어려워지자, A4용지 한 장에 단답형으로 답을 적어내면서, 그것으로 토론과 표결을 대체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어려워지자 전자우편으로 A4용지 한 장짜리 의견서를 받아서 아무런 토론도 이뤄지지 못한 주제에 대해 보고서를 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학생들끼리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일이 대학교수라는 사람들이 참여한 전문가협의체에서 벌어졌다. 바로 밀양 송전탑 전문가협의체 이야기다.
나는 밀양 송전탑 전문가협의체에 반대대책위원회 쪽 위원으로 추천돼 참여했다. 그리고 지금 언급한 베끼기 행태에 대해 직접 문제제기를 했다. 만약 내가 잘못된 문제제기를 했다면, 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얼버무리기로 이 사태를 넘기려 했다. 베낀 보고서를 쓴 사람 중에는 서울대 전기공학과 교수도 있었다. 이런 사람들을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 뒤에는 파일을 건네준 한국전력이 있었다. 한전은 ‘영혼 없는 전문가’들을 앞세워 경남 밀양 주민들이 8년 동안 싸워서 얻어낸 전문가협의체를 파행으로 몰고 갔다. 한전은 애초부터 송전탑 공사 강행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언론은 베끼기 문제를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언론은 베끼기 보고서가 ‘전문가 의견’이라며 밀양 송전탑 공사를 강행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에너지 같은 분야는 관료·전문가·언론이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시민들에게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고, 자기들만의 성을 쌓아왔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세계 최고의 원전 밀집도이고, 그 원전에서 생산된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필요하다면서 마을과 논밭 위로 초고압 송전선을 건설하는 정책이었다. 이들에게 시골 주민들의 인권·환경·정의 같은 단어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나 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미국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있다. 초고압 송전선로에 대한 회의론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2008년 7월 미국 상원에서 초고압 송전선로에 관한 청문회가 열렸다. 청문회에는 조지 로라는 전문가가 출석했다. 그는 45년 이상 송전 관련 업무에 종사해온 전문가였다.
“초고압 송전선은 신뢰도 떨어뜨린다”조지 로가 증언하려고 나온 주제는 ‘장거리 송전을 위한 초고압 송전선이 과연 필요한가? 이것이 전력계통의 신뢰도(reliability)를 높이는가?’의 문제였다.
당시 미국에서도 초고압 송전선이 이슈가 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미국 서부 오하이오의 석탄화력발전단지에서 생산한 전기를 765kV 송전선로를 통해 동부 지역으로 송전하려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것은 PATH(Potomac-Appalachian Transmission Highline)라고 불리는 새로운 송전선으로 버지니아·웨스트버지니아·메릴랜드 등 여러 주를 통과할 계획이었다.
송전사업자 쪽은 이 송전선로를 추진하면서 ‘2003년 미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정전 사태를 피하려면 새로운 송전선로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초고압 송전선로를 건설하는 것은 정전 사태와 무관하다고 주장해왔다. 이런 논쟁이 벌어지자 조지 로가 증언을 하기 위해 청문회에 출석한 것이다.
조지 로는 청문회에서 “전력계통의 신뢰도는 하늘에 있는 송전선로의 수에 달려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2003년의 대규모 정전 사태도 전력계통을 운영하는 능력이 모자라서 발생한 거지 송전선 수가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조지로는 초고압 송전선은 전력계통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고 지적한다. 초고압 송전선으로 전기를 보내는 방식은 고장이나 테러의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조지 로는 “전력계통의 신뢰도를 높이는 가장 좋은 방식은 전기 소비지 부근에서 전기를 생산해서 장거리 송전이 필요 없게 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조지 로의 증언은 초고압 송전선로 건설을 재검토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그에 따라 2009년 버지니아주의 기업규제위원회와 메릴랜드주의 공공사업규제위원회는 이 송전선로 사업을 불허하는 결정을 내린다. 사업자도 2012년 송전선로 건설을 공식적으로 포기하는 결정을 내린다.
미국에서 이런 결정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나라와 달리 송전선로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독립성이 보장된 규제위원회가 지역 분산형 발전이나 전력 수요 관리 등을 통해 송전선을 새로 건설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검토하게 되어 있다. 전문가들도 사업자의 편만 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위치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오로지 한전, 전력거래소, 정부의 편에 선 전문가들만이 존재해왔다. 이들은 ‘새로운 송전선로를 지으면 없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수준의 전문가스럽지 못한 논리로 무분별한 송전선로 건설에 들러리 역할을 해왔다. 그러다 도를 넘어서서 베끼기까지 한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베끼기를 한 전문가들의 말을 근거로 ‘이제 더 이상의 공론화는 없다’며 밀양 송전탑 공사를 밀어붙이려 한다. 한전은 8월부터 공사를 재개한다는 얘기를 흘리고 있다.
정전 사태 위협… 미국과 같은 주장 펼치는 정부그래서 참 답답하다. 아무리 봐도 밀양을 지나는 765kV 초고압 송전선로는 불필요하다. 고리·신고리 원전에서 생산되는 전기는 지금까지 기존의 345kV 송전선로 3개 노선을 통해 문제없이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이 노선들의 용량을 늘리면, 완공을 앞두고 있다는 신고리 3·4호기의 전기도 송전할 수 있다. 새로운 원전은 다 짓더라도 가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지만, 설사 가동하더라도 송전이 가능하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그런데 정부와 한전은 이런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TV 공개토론을 해도 좋다. 정부와 한전은 ‘새로운 765kV 송전선로를 건설하지 않다가 기존 송전선에서 사고가 나면 대규모 정전이 일어난다’고 국민을 협박하지만, 그것도 진실이 아니다. 2000년 이후 송전선로에서 고장이 난 적은 많고, 그로 인해 발전기가 정지한 사례도 25차례나 되지만, 정전으로 이어진 경우는 한 차례도 없었다. 그리고 조지로가 미국 상원에서 증언한 것처럼, 초고압송전선로를 더 짓는다고 해서 전력계통의 신뢰도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바닷가에 대규모 발전소를 지어서 대도시나 대공장으로 송전하는 현재의 전력시스템에 있다. 이런 시스템이 전력계통을 불안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다.
그래서 밀양은 단지 밀양만의 문제가 아니다. 밀양은 우리의 전력 시스템 전반을 재검토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논의를 회피하는 비겁한 자들은 한전과 정부, 그리고 그들에게 영혼을 판 전문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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