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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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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나들이

등록 2004-01-02 00:00 수정 2020-05-03 04:23

컴컴한 새벽부터 흩날렸을 눈발 무시하고 끌고 나온 차가 번들거리는 오르막길을 간신히 차고 오른다. 아들 두 놈 제각각 학교 앞에 떨구고 나니 눈발 뒤편 햇살이 강렬하다.
마침 서울 출장길이 같아 핵폐기장 반대 대책위 실무자의 차를 얻어타고 서해안고속도로에 나서니 굵은 눈발이 사정 두지 않고 쏟아져내린다. 부안 즈음에 이르니 눈송이들이 퍼붓듯 달겨든다. 추월해 앞서던 차는 이미 가드레일을 치받고 레커차에 매달리고 있다. 군산 지나 전라도 땅 벗어나니 ‘햇볕은 쨍쨍 도로길은 반짝’이다.
못 다신 눈맛에 입만 쩝쩝대며 서울에 들어서니 휑한 겨울바람이 매섭게 파고든다.
1시간여나 늦어버린 회의에 참석하느라 마음은 바빠도 오늘저녘 스케줄에 머릿속은 거미줄처럼 꼬인다.

서울 출장 핑계대고 내일은 토요일이겠다 모처럼 쌈박하게 놀고 가리라 맘먹은 터, 1초가 아깝다.

저녁 7시30분엔 시누이랑 뮤지컬을 보러가기로 했다. 6시30분 끝을 보아가는 회의장 박차고 맹추위 가르며 뛴 덕에 불광동에서 양재역까지 가는 지하철에 겨우 몸을 싣고 그제사 안도의 한숨 내쉰다.

공연 시작 5분 전 저만치 뛰어오는 시누 손 잽싸게 채고 눈썹 휘날리며 강남 거리를 뛰어다닌다.

우리 앞의 40대 여성도 딸과 함께 무지하게 잘 뛴다.

턱걸이로 입장해 자리 찾아 앉으니 그제사 뮤지컬 제목이 보인다. “폴몬티-남자들이 벗는다는 그거냐”고 소리 낮춰 시누에게 물으니 회심의 미소로 대신한다. 소극장 연극이건, 스케일 큰 뮤지컬이건 무대 연극을 본다는 사실만으로 황홀경에 빠지는 나로서는 공연 시간만큼은 최고조의 행복감을 맛본다. “고개 숙인 아버지 기 살리기네”라고 쓰겁게 결론지어도 흥겨움에 달떠 몸이 움직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공연 열기 가시지 않은 채 맥주집에 걸터앉아 수다에 늘어지다가 새벽길 택시에 올라타 미혼의 시누이 둘이 사는 집으로 간다. 쉬는 토요일 걸린 막내시누와 오전엔 영화 보기로 시골 아줌마의 문화적 갈증 삭이고 백화점 아이쇼핑까지 곁들인뒤에야 터미널로 향한다.

쇼핑 시간 벌려고 부러 오후 6시20분 차 예매하고 터미널 지하상가를 더듬는다. 사람에 밀리며 액세서리 두어개 사다보니 1시간이 후딱 간다. 서둘러 영광발 차에 올라타니 그제사 편한 잠 밀려온다.

고흥으로 시집간 후배가 서울 친정만 가면 종로, 신촌 거리나 백화점을 하루 종일 쏘다니며 문화적 갈증을 채운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13년을 영광댁으로 살아온 내게도 일년에 한두번씩 되살아오는 문화적 허기를 어쩌지 못하는 것을 보면…. 서울은 이런 식으로 내게 고향임을 일깨운다. 코 베어갈 듯 매운 바람 윙윙 우는 서울에 ‘고향애’ 한 바가지 두고 온다.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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