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여성(외국인여성) 한글교실 자원활동 회원들과 수다를 곁들여 점심을 먹고, 병원에서 어제 퇴원한 경진씨에게 축하인사차 떼로 몰려가 수술 자국이 당긴다며 괴로워하거나 말거나 웃음 한 바가지 안겨준 대가로 차 한잔 얻어마시니 오후 2시다. 민방위 훈련 사이렌 소리 핑계 삼아 눌러앉아 “맘 맞는 사람끼리 재미있는 모임 하나 만들자”는 제안에 모두가 동의하고 이름찾기에 골몰한다. “8명이니 8공주 어떨까?”라는 경미씨 제안에 ‘되네, 안 되네’ 와글와글 하던 판에 내가 ‘허스토리’를 내어놓자 갑자기 놀고 먹는 모임에서 페미니스트들의 모임이라도 되는 양 뜨악한 표정이 되어 “음. 좋은데” 정도로만 접수한다.
각양각색의 인생 스토리를 갖고 사는 30대 여성들인지라 그네들의 삶의 역사가 내심 무거웠을까? 하고 싶은 것과 발목 잡힌 일들로 갈등이 많은 시기인지라 녹록지 않은 삶과의 힘겨운 숨고르기가 느껴진다.
모임 날짜만 잡고 헤어져 사무실로 오니 산달이 가까운 임산부가 힘겹게 계단을 올라온다. 둘째아들 태권도장 선생님이다. 큰애 임신했을 때 남산만하던 내 배를 보는 듯해서 아슬아슬하다. “요즘 같아선 빨리 낳고 싶지요 잠자기도 불편할 텐데”라고 진심으로 걱정하니 “그러게요”라며 숨을 턱 끝에 매단다.
“언니, 나 좀 도와줘요”라는 SOS 전화를 받고 오후 6시가 다 되어 후배 집으로 찾아가니 이야기 보따리가 한 아름이다. 곪아 썩어가는 자신의 몸과 마음보다 식구들 저녁식사가 먼저인 후배이다 보니 나와 그의 말도, 감정조절도, 처방도 빨라질밖에….
상담 마치고 서둘러 집에 오니 집안엔 젖국과 고춧가루, 무의 단내가 한가득이다. 밭에서 총각무와 무를 얻어오신 어머니는 김치 담그려 거실 하나 어질러놓았다.
절임만 하는 줄 알고 운동갔다 와서 김치 담그면 되겠다는 계산을 굴리며 열심히 운동하고 9시 넘어 돌아오니 어머니는 김치 버무리기에 정신없다.
“아야. 맛 좀 봐라. 가만 있어봐야, 내가 이쁜 걸로 줄팅게.” 임산부도 아닌데(그럴 일도 절대 없지만) 굳이 이쁜 것 찾는 어머니 말에 한 구석이 찔려온다. 다른 시어머니 같으면 김치판 벌여놓은 줄 알면서도 운동하겠다고 나간 며느리를 구박할 텐데 오히려 이쁜 총각무 골라 입에 넣어주신다. “맛나네요”라며 서걱서걱 염치없이 집어만 먹다가 기어이 밥 한 그릇 퍼서 뚝딱 해치운다. “내일 때(잔디)밭 일 갈란디 언제 담겄냐. 밤에라도 담아야제”라며 김치통 4통을 마저 채우는 어머니를 보며 어머니의 허스토리는 몇권의 책으로 묶으면 다 토해낼까 싶다.
남자들의 역사로만 가득 채워진 히스토리(history)가 아닌 여성들의 통곡과도 같은 삶이 배여 있는 허스토리가 오늘 밤 왜 이리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지….
유쾌하게 만나다가도 한순간에 무너지며 절박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여성들의 스토리를 접할 때마다 마음 둘 곳을 한동안 잃어버린다.
오늘 하루 만난 ‘이주여성들, 수녀님, 농민집회에 나온 여성 농민들, 우리 회원들, 임산부, 시어머니, 그리고 나까지’ 제각각 여성들 삶의 스토리가 코 빠진 그물처럼 더러 엮이고 더러 끊기며 가슴엔 답답한 애만 끓는다.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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