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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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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등록 2003-12-11 00:00 수정 2020-05-03 04:23

“언니, 나 팔 아파요. 3시간 동안이나 저어야 해요.” 붙임성 좋은 쟈넷이 더듬거리며 가져온 필리핀 떡을 설명한다. 노리꼬상은 팥 버무리 같은 일본 떡을 만들어오고, 부회장님이 양계장에서 막 잡아 튀겨낸 닭튀김과 한창 수확 중인 군남 영란씨네 파프리카가 입맛을 돋운다. 무시(무)·배추 작업반장인 법성 봉정씨는 약밥 날라오고 묘량 사는 효숙씨도 농사 지은 호박으로 호박죽을 맛나게도 쑤어왔다. 떡집 개업한 인순씨는 돈부고물 얹은 시루떡을, 주유소 월말정산에 바빴던 경진씨도 김밥을 말아왔다. 몇몇은 김장김치, 나물 무쳐오고 어린이집 강당을 행사 장소로 내어준 오귀진씨는 실가리(시래기) 된장국을 끓여 내놓는다. 직장여성들은 과일이며 음료수로 미안함을 달래며 2003년 송년회 잔칫상이 푸짐하게 차려진다.

입만 갖고 나타난 경미씨 “이렇게 한께 재미있구마~잉” 하며 입맛 다시고 한편에선 페이스 페인팅 하느라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줄을 섰다.

매일 또는 1년에 한번이나 볼까말까한 회원들까지 아이들을 한둘 달고 들어선다. 딸아이가 팝송 부른다기에 따라왔다는 엄마에게 ‘회원가입서’ 내놓고 꼬드기는 전정숙 회원사업팀장님 입이 바쁘다. 홍농에서 유기농사 짓는 해자씨는 첫 참석임에도 유기농 쌀과 검은콩을 상품으로 주저 없이 내놓는다. 고생한 품 생각에 미안해하자 홍보 많이 해달라는 말에 염치 떨치고 냉큼 받고 본다.

왁자하게 먹는 시간 끝내고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들 올려놓은 여성제단에 촛불이 댕겨진다. 누구 아내, 누구 엄마로 살아온 여성들에게 40여명의 입 모아 이름 석자 힘차게 불러주니 상기된 얼굴로 한햇동안 살아온 이야기들 풀어놓으며 웃음으로 혹은 눈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엄마 따라온 10살짜리 은서는 “여자 어른들이 모여서 노는 게 재미있고 나도 여자니까 당연히 가입해야지요. 용돈에서 1천원씩 회비도 낼 거예요”라며 최연소 회원가입 소감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모임별 장기자랑엔 일어팀은 기모노 입고 승부를 걸고, 영어팀은 아이들까지 동원해 캐럴을 선사한다. 판토마임으로 직장과 가정, 그리고 여성의전화에서의 바쁜 일상을 표현하며 배꼽 빼고 성교육사업팀의 콘돔 끼우기 실습엔 눈이 충혈()되도록 집중한다.

개인 장기자랑과 이주여성들 노래에 이어 마지막으로 상근 활동가들이 마련한 ‘울랄라 시스터즈’ 공연에 관객들 뒤집어진다. 상근 활동가인 나와 정민씨 외에도 ‘울랄라 시스터즈’를 위해 며칠 밤 아픈 허리 부여잡고 안무 짜고 연습시킨 선정씨 공이 크다.

한햇동안 농촌여성 인권현장에서 열심히 뛰어준 회원들에게 해오름상, 빛나리상, 타오름상 시상하며 아낌없이 박수도 얹어주었다. 유기농산물과 닭 3마리가 상품으로 전달되자 부러움이 하나 가득 일렁인다.

마지막으로 둥근 원으로 모여선 회원들, 돌아가며 짧은 포옹 긴 자매애를 나눈다.

“당신들이 내게 준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노라”는 내 고백처럼 올 한해 많은 여성들도 “행복했었노라”는 고백이 많았으면 좋겠다.

내년에는 좀더 행복해지자.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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