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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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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헌 놈의 악연

등록 2004-02-19 00:00 수정 2020-05-03 04:23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오늘은 사람 이야기가 아니다. 영광땅과 맺어진 ‘핵발전소’와의 악연 이야기다.

한국형 원자로라고 자랑해 마지않던 영광핵발전소 5·6호기가 1년 새 모두 고장나고, 5호기에서 방사능이 누출되어 5일간 3500톤의 바닷물을 방사능에 오염시키고도 누구 하나 책임지거나 원인을 말해주는 이 없다.

지난해 4월 계획된 정비기간에 우연히 발견된 5호기 열전달완충판 이탈 및 원자로 손상 사고도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넘어가더니 무재해 운전 330일 축하파티까지 열었던 한국수력원자력(주)(한수원)은 며칠 못 지나 6호기에서도 똑같은 사고가 났음을 시인해야 했다.

6호기가 사고난 지 얼마되지 않아 일어난 방사능 누출 사고는 더욱 기막히다. 5호기에서 방사능 누출경보가 울려도 “이럴 리 없는데” 하며 애꿎게 고장을 알리는 센서만 뜯었다 붙였다 하는 사이 5일 동안 영광군민은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방사능은 하릴없이 바다로 흘러들었다. 원인규명을 요구하는 성난 주민들 앞에 과학자들은 변명조차 제대로 못하고 황망히 자리를 뜨기 바빴다.

설 뒤끝이었을까? 우연히 아이들과 분식집에 들렀는데 기막힌 이야기가 우연찮게도 내 귀에까지 들린다.

옆자리 네댓명의 할아버지들 가운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양반이 돈가스를 썰어대며 “사무실 열었담서”라고 묻는 친구에게 자랑 삼아 말한다.

“그란혀도 이아무개한테서 명절 전에 전화왔드만. 설 쇠면 슬슬 활동하셔야지요.”

그때만 해도 뭔 말인지 몰랐고 돈가스를 썰던 할아버지가 많이 본 듯하다는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가물가물한 기억 끝에 “거그 사무실 가도 된가?” “그라제, 암시랑토 않당게. 놀러들 와” “아니 청소라도 하문 돈 준가 혀서…, 껄껄껄!”

거기까지 듣고 나니 돈가스 할아버지가 누군지 알겠다. 지난해 핵폐기장 유치위원장 했던 할아버지 아닌가?

핵발전소 사고로 온 동네가 시끌벅적한데 “설 쇠면 활동(핵폐기장 유치)하라느니, 사무실에 놀러 오라느니” 하는 밀담(?)을 버젓이 분식점에서 내놓고 이야기하다니….

얼마 전 영광군의 주도로 만들어진 핵발전소 사고 공동조사위원회 회의에 나타난 한수원 고위간부의 말이 가관이다.

지역민의 모든 요구들을 조건 없이 수용하겠다던 정부와 영광군과의 협상 내용이 버젓이 있건만 “조사 용역기관 선정을 위한 독일 시찰에 주민쪽에서 내세운 전문가를 데려갈 수 없다는 것과 그사람이 갈 경우 어떤 내용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큰소리를 쳤단다. 적반하장도 유분수고 방귀 뀐 놈이 성내다가 똥칠할 일이다.

고장의 원인도 아직 모르는데 고장난 6호기에 핵장전을 했단다. 얼마나 큰 사고를 부르려고 이러나?

오늘 부안에서 핵폐기장을 둘러싼 주민투표가 진행됐다. 핵폐기장 이전에 정부와 한수원은 핵발전소의 안전성부터 책임져야 한다.

돌이킬 수 없는 핵 사고가 난 뒤엔 어떤 대책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핵’과 맺어진 악연, 생각만 해도 징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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