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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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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04-01-15 00:00 수정 2020-05-03 04:23

“긍께 내가 볼링공이여. 부회장님이 농민 역할인께 볼링공을 밀면 굴러가서 신자유주의 무너뜨리고, 다국적 곡물사 쓰러뜨리고, 농가부채에, FTA까정 밀어불면 미국놈만 남제라.”
“그담은 어찌라고?”
“쓰러진 농민의 적들이 시민, 학생, 노동자가 되야서 미국놈에게 덤벼들어 밟아불고 농민과 국민이 승리하는 해피엔딩이랑께.”
정민씨는 나와 회원들 몸에 미국, 다국적 곡물사, 농가부채, FTA 팻말을 붙여놓고 떼구르르 구르듯 뛰어오며 온몸으로 퍼포먼스를 설명한다.

단지 맷집 좋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미국놈’ 하란다.

“사무국장은 미국놈인께 끝까지 버티다가 우리한테 얻어터진 뒤 쓰러지는 것이여”라며, 내게 처절히 맞아줄 것을 주문한다. 까짓것 조국과 농민, 조직을 위해 이 한몸 못 바치랴.

전국 여성활동가들이 모이는 총회 때 선보일 장기자랑을 ‘농업·농민 문제’로 해보자고 하루 전날 한 시간 머리 맞대고 콘티 짜고 오늘 출발하기 직전까지 “극본 쓴다, 음향효과 맞춘다, 리허설한다” 수선떨어 만들어낸 작품이다.

“상품이 쓰겁다(좋다)”는 꾀임에 넘어가 준비는 했지만 대상 탈 것 같은 예감에 차오른다.

남한 국토의 절반격인 충남 유성으로 향하는 발길에 ‘농업, 농민, 여성’을 가져가려니 설레기도 한다.

드디어 장기자랑 시간. 26개 지부중 9번째가 우리 순서다.

웃음과 끼 넘치는 분위기 평정하고 농민가 음악 깔며 무대에 오른다.

볼링공으로 분한 정민씨의 헌신적인 연기 끝에 장내는 엄숙과 진지의 도가니다. 드디어 미국놈인 나만 남자 객석에선 “미국놈 죽여라” “농민 파이팅”을 외쳐댄다. 나를 향해 돌격하는 농민, 노동자, 시민, 학생을 향해 버텨보지만 뒷다리걸기에 넘어진 미국놈을 사정 두지 않고 두들긴다.

연기를 가장해 평소 내게 쌓인 웬수(?)를 갚을 양인지 무수한 발길질과 주먹질이 오간다.

드디어 쓰러진 미국놈이 ‘항복’하니 객석에선 박수가 터져나오고 “농업, 농민, 여성 만만세”를 외친 뒤 무대를 내려온다. 잘못 스친 주먹에 입을 맞았는지 한동안 입 안이 얼얼하다.

결국 대상인 ‘잘했군 잘했어’상을 거머쥐었다.

무대를 내려와 농민회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국회비준 저지 투쟁을 위해 국회로 향했던 농민회원들은 어찌되었는지? 비준안은 통과되었는지? 궁금증과 걱정이 밀려온다.

며칠간의 노숙투쟁에 이어 오늘 1천여명의 농민이 국회 앞에서 격렬히 투쟁하는 과정에서 60여명의 농민, 학생들이 연행되었단다. 농민들의 투쟁으로 FTA 비준안은 상정되지 못했고 다음 임시국회인 2월9일로 연기되었다는 말에 안도하면서 지난달 국회 앞에서 경찰의 곤봉과 소방 호스에 날아가던 농민들 모습이 생생히 살아온다.

우리의 연기와 농민들의 투쟁에 보내는 여성운동가들의 환호와 박수가 오늘 투쟁에 기운을 보탠 것 같아 미안함을 약간이나마 덜어본다.

농민과 국민이 힘을 합쳐 미국과 FTA를 물리치며 환호성 울리는 그날을 ‘꿈’꾸는 게 우리에겐 무대 위에서만의 ‘꿈’일까? 올 겨울은 따뜻하다는데 새해 바람이 더욱 차게 밀려온다.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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