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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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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졸업장

등록 2003-12-26 00:00 수정 2020-05-03 04:23

초겨울 따뜻한 햇살을 틈타 부회장님 집 앞뜰에 고소한 연기가 타오른다.
40여일 키워낸 닭 출하하고 닭파티가 한창이다. 일명 닭로스파티….
털 벗긴 영계들이 숯불에 그을리며 연기로 한창 맛을 달구고 있다. 면장갑 낀 부회장님 남편은 20여마리의 닭을 뒤집으며 어서 먹으라고 성화다.
동네사람들 틈에 끼어 일어 소모임 야외수업을 핑계 삼아 초대받은 우리도 면장갑 끼고 달려들어 입가가 새까매지는 줄도 모르게 닭다리, 닭날개, 똥집 집어들고 씨름한다. 부회장님 막 담근 생김치에 현미밥 내오니 미어터져라 입으로 몰아넣는다.

“이 재미로 촌에 산당께.” 복사꽃 같은 웃음 머금은 부회장님 얼굴은 먹이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고 보니 새해 2월이면 부회장님이 늦깎이 고등학생 신세를 면한다.

그 옛날 가족부양과 생계를 위해 일찍이도 생활전선에 내던져졌던 많은 여성들처럼 부회장님도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돈벌이로 나서야 했단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 양계장을 크게 운영하며 아이들 셋을 키워냈지만 가슴속에 허전함이 남는 건 아마도 공부에 대한 욕망이었나 보다.

“고등학생들 앞에서 성교육 하려니 맘이 영 안 좋드만. 왠지 떳떳치 못한 것 같고….” 부회장님이 늦은 고등학교 공부를 결심하게 된 배경이다.

4년 전 여성학 소모임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삶도 많이 바뀌었다는 부회장님은 3년 전 막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 주에 배운 과학시간 이야기에, 아줌마 학생들에 대한 수다를 신이 나서 늘어놓곤 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몰아서 하는 수업이지만 시험 때면 밤샘, 벼락공부도 마다하지 않더니 1·2등을 놓치지 않는 눈치다.

6만수나 되는 닭을 키워내면서도 ‘교회일이다, 집안일이다, 여성의전화 일이다’ 바쁘게 돌아치며 3년을 꼬박 고등학생으로 살아내려니 얼마나 종종걸음치며 살았겠는가?

그래도 학교생활이 “너무 재미있다”며 삶의 나이테를 늘려가는 부회장님 모습에 소리 없는 박수만 열심히 쳐댔다.

얼마 전 송년회 때 모두 앞에서 부회장님은 당당하게 3년 동안의 고등학교 생활을 소개했다. “여성운동을 만나서 여성임을 알게 됐고 이젠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았노라”고 고백하는 부회장님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내 가슴까지 적셨다.

“졸업식이 언제예요? 우리 꽃다발 들고 가야지.” “아냐, 오지 마” 하며 내빼도 한없이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아침마다 눈뜨면 시골에 살고 있음에 감사기도를 올린다는 부회장님.

봄마다 고사리 꺾는 재미에 미치고, 놀리는 땅 아까워 콩이며 땅콩, 깨 심어놓고 아침저녁으로 그놈들 커가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시골사랑을 외치는 부회장님은 더 큰 세상으로의 발돋움을 당차게 준비하고 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실” 부회장님께 “꽃다발을 한아름” 안겨드려야겠다.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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