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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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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내들 쥐불놀이

등록 2004-02-12 00:00 수정 2020-05-03 04:23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눈보라가 잠시 잠잠한 틈을 휘~잉 살갗을 가르며 바람이 파고든다.

대보름달은 눈발과 구름 속에 꽁꽁 감춰둔 채이다.

문득 군남 사는 영란씨가 4일 군남 포천리 지내들에서 열린다는 대보름맞이 들불놀이에 오라던 데 생각이 미친다. 퇴근하고서야 선정씨네 아이들 셋과 둘째 성호를 데리고 밤이 내려앉은 군남길로 내달린다.

이곳에서 7년여 농사짓고 살았던 터라 오랜만에 들어선 길이 반갑고 낯익다.

군남면 초입에 들어서니 지내들은 쥐불놀이에 신난 아이들과 어른들, 무대 중앙의 불탑으로 환하게 타고 있었다.

행사가 막바지인지 농악대가 불탑 주위를 돌며 늙거나 젊거나 한 사람들의 춤사위가 한창이다. 흥에 겨운 대덕리 젊은 이장님도 보이고 이장 부인 숙희 언니도 불길 닿은 얼굴을 너울거리며 춤춘다. “오메 승혁이 엄마 아닌가?”라며 남창리 분임 언니와 반가이 인사하고 보니 놀기 좋아라 하는 장혈리 아짐, 아저씨들도 아는 체하신다.

훨훨 타오르는 불탑의 기세에 저항하듯 눈발이 다시 퍼붓는다. 눈과 불이 대결하는 논 한가운데서 대보름 불놀이가 제법 거세어진다. “언니 애들 데리고 쥐불놀이 하러 가자”는 선정씨 말에 깨어 논둑 곳곳에서 깡통 돌리는 아이들에게 다가간다. 기세 좋던 불길은 사그라지고 빨간 몸뚱이 드러낸 숯더미에 볏짚 모아 불길을 사르니 작은 불탑이 또 하나 생긴다.

선정씨가 후후 불어 만들어낸 불땀을 깡통에 담아 아이들에게 건네주니 아이들은 무서운가보다. 엉거주춤한 폼으로 받아들더니 이내 한두번 돌리고 나서는 한결 자신감 있게 쥐불을 돌린다. 겁 많은 성호도 내가 개폼 잡아가며 돌려 논으로 냅다 던진 깡통에서 쏟아진 벌건 숯불을 보더니 슬쩍 구미가 당기는지 깡통을 가져간다.

정초 처음 돌아오는 쥐의 날에 쥐와 논둑의 해충을 잡는다는 전통놀이의 뜻은 몰라도 좋다. 합법적으로 불놀이를 한다는 쾌감에 선정씨와 내가 더 신이 나 있다. “에, 오늘 행사 준비하니라 힘쓴 군남 농가주부모임 회원 여러분 마지막 한번 신나게 놀아봅시다”는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자 불탑 너머 무대에선 장혈리 오점례 부녀회장님의 노랫가락이 하늘을 울린다. 노래는 순서를 타고 넘어가고 밤은 깊어 집으로 향하는 행렬이 길어진다. “느그덜 오늘 오줌 크게 싸겄다”는 지나는 아저씨의 놀림도 싫지 않은지 그제사 재미 붙인 재인이 발 뗄 줄 모른다.

마지막으로 ‘풍년농사, 무사안녕’이라는 소망이 불길로 타오르고 “농자천하지대본야”라고 씌인 깃발이 유난히 펄럭인다.

쥐도 잡고 해충도 잡았는데 농업이 천하의 주인이 되는 날은 오려나?

눈보라에 잡힌 대보름달에다 대고 빌어나 볼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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