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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당신은 왜 꼬불꼬불한가요

등록 2003-11-13 15:00 수정 2020-05-02 19:23

한 가닥의 길이 65cm, 총길이 49m인 라면의 모든 것… ‘틈새라면집’에는 젊음의 맛이 있다

윤대녕의 소설 의 주인공은 ‘해리성 기억상실’에 걸린 남자다. 그는 기억상실의 상태로 지하철 2호선 시청역과 덕수궁 대한문 근처를 방황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 남자는 우연히 근처 편의점에서 라면 요리사 서하숙을 만나게 된다. 서하숙은 자신의 자취방으로 그 남자를 데려가 그의 기억이 회복될 때까지 남의 기억을 빌려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이 남자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우연히 직장 동료를 만나 옛 기억을 떠올리고 자신의 가족을 되찾지만, 가족과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서하숙에게 되돌아오고 만다.

서하숙은 신촌 부근의 새로 생긴 라면전문점들을 돌며 조리 강습을 해주고 파출부처럼 일급을 받는 여자다. 그녀의 다섯평 월세방 벽면에는 라면 조리법들이 깨알 같은 글씨로 빽빽이 적혀 있다.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 조리법을 노트에 옮기고, 그녀가 만들어놓은 인터넷 홈페이지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는다. 그녀는 이 노트 세권으로 라면요리에 대한 책을 낼 꿈을 갖는다. 그러나 서하숙의 라면요리 단행본은 아직 출간되지 않은 것 같다. 단지 그녀가 깨알 같은 글씨로 정리한 노트 세권을 살며시 들여다본 작가 윤대녕이 소설에서 밝힌 그 일부를 옮겨본다.

라면이란 일반적으로 면을 증숙시킨 뒤 기름에 튀긴 유탕면이나 기름에 튀기지 않는 건면에 수프를 합친 것을 말한다. 조리가 간편하고 저렴하다는 특성으로 제2의 쌀이라고 불리는 라면은 1958년 안도우 시로후쿠라는 일본인이 술집에서 튀김요리 과정을 유심히 살펴보던 중 제조법을 생각해냈다. 즉, 밀가루를 국수로 만들어 기름에 튀기면 국수 속의 수분은 증발하고 면이 익으면서 속에 구멍이 생기는데, 이 상태로 건조했다가 풀어지게 한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해 가을 일본의 ‘일청식품’이 국수발에 간단한 양념 국물을 가한 아지스케 면을 ‘끓는 물에 2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달고 시판한 것이 오늘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애용하고 있는 라면의 효시이다.

라면 하나는 약 75가닥의 면발로 구성되었고, 한 가닥의 길이는 대략 65cm, 총 길이는 49m, 열량은 520kcal 내외이고 그 중 탄수화물이 80g, 단백질이 10g, 지방 17g이 함유돼 있다. 면을 꼬불꼬불하게 만드는 방법은 라면을 날라주는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라면이 나오는 속도보다 느리게 해서 가닥이 위로 겹쳐 올라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좁은 공간에 많은 부피의 면발을 담으려면 직선보다는 곡선이 유리하기 때문이요, 둘째 영양가를 높이면서 유통과정의 보존기간을 오래 지속하려면 튀김 공정에서 빠른 시간에 많은 기름을 흡수해 튀겨지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수분 증발을 돕는 공간이 필요하므로 곡선형이 유리하며 꼬불꼬불한 틈으로 뜨거운 물이 스며들어 조리시간을 짧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 셋째, 미학적 기준으로 볼 때 유선형이 시각과 미각적 효과를 더욱 높여준다. 또 유통과정의 파손 방지나 취급상의 용이성도 빼놓을 수 없다.

라면은 젊은이의 음식이다. 그들만의 독특한 식성대로 무궁무진하게 퓨전하여 메뉴를 개발할 수 있을 뿐더러, 바삐 움직이는 그들의 행동양식에 맞게 ‘빨리빨리’ 조리되고 ‘빨리빨리’ 먹을 수 있어 좋다. 서울 신촌의 이화여대 정문 부근 ‘틈새라면집’(02-362-1281)은 서너평 전체에 젊음이 꽉 찬다. 생동감이 톡톡 넘치는 여대생 손님뿐 아니라, 주인인 김학범씨 부부 역시 푸근하면서도 젊어서 좋다. 23년 전 명동의 건물과 건물 사이의 작은 ‘틈새’에서 맛과 정성 하나로 라면집을 시작해 이제는 어엿한 식품체인업체로 자리잡은 ‘틈새라면’의 명물인 ‘빨계떡’(빨간 국물에 계란과 떡을 넣은 라면)은 입에서는 맵지만 속에서는 시원한 그 맛으로 까다로운 여대생들의 입맛뿐 아니라 간밤의 숙취로 시달린 꾼들의 속을 확 풀어준다.

김학민 | 학민사 대표 · 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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