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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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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의 이름을 찾아…

등록 2003-09-07 00:00 수정 2020-05-03 04:23

고려 · 조선시대 거치며 변천 거듭, 피로를 ‘죽여주는 동치미 국수’집

무나 배추 따위를 양념하지 않고 통으로 소금에 절여서 묵혀두고 먹는 김치를 흔히 ‘짠지’라고 하는데, 황해도·함경남도 지방에서는 보통의 김치 자체를 짠지라고도 부른다. 또 경기도 지방에서는 무를 절이지 않고 소금물에 짜지 않고 삼삼하게 담근 김치를 ‘싱건지’라고 부른다. 오이를 짠지 비슷하게 담근 것은 ‘오이지’다. 이 밖에 부추도 고춧가루와 젓갈로 버무려 김치를 담그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이 부추김치를 ‘솔지’ 또는 ‘정구지’라고 한다. 장아찌는 무, 배추, 오이 등을 썰어 말린 뒤에 간장에 절인 반찬을 말하는데, 우리의 옛 조리서에는 ‘장지’라고 되어 있다.

이 짠지, 싱건지, 오이지, 솔지, 정구지, 장지 등에 붙은 ‘지’란 무엇일까? ‘지’는 16세기에 김치의 옛말인 ‘딤채’가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렀던 김치의 이름이다. 12~13세기에 걸쳐 살았던 고려시대의 시인 이규보는 에서 김치 담그는 것은 ‘염지’(鹽漬)라고 했는데, ‘漬’는 적실 지, 물에 담글 지로 풀이되므로 곧 ‘지’가 김치임을 추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 말기가 되면서 ‘지’는 슬며시 사라지고 갑자기 ‘저’(菹)가 김치를 뜻하는 말로 떠오른다. ‘저’는 의 “오이를 깎아 저를 담자”는 시구에 처음 나오는 말인데, 나 에 ‘저는 신맛의 채소’ 또는 ‘초에 절인 오이가 바로 저’라고 되어 있으니, 우리의 김치와는 다른 오늘날의 피클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가 ‘저’로 되었을까?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신라의 문물과 국가정신을 이어받아 불교를 사회안정의 수단과 봉건제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다. 불교는 고려 왕실의 전폭적 후원으로 몽골이 침입하기까지 명실 공히 국교로서 전 고려사회를 지배했으나, 고려 중기 주자학의 유입으로 점차 유교 세력에 눌리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는 김부식의 의 예에서 보듯이, 철저히 복고주의·사대주의·모화사상으로 흘러서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 것을 버리고 중국 것만 숭상했으니, 에 나왔다 하여 김치를 중국에서도 6세기 이후에는 거의 쓰지 않았던 글자인 ‘저’로 불렀다.

‘딤채’라는 말은 조선 초기에 보인다. 1518년 에 “무딤채국을 집안 사람이 다 먹어라”라는 구절이 나오며, 1525년 에는 저(菹)를 ‘딤채 조’라 하였다. 그러면 ‘딤채’는 무엇일까? 이때의 김치는 고춧가루와 젓갈을 쓰는 오늘날의 김치와는 달리, 소금을 뿌린 채소에다 마늘 같은 몇 가지 향신료만을 섞어서 절임으로써 채소의 수분이 빠져나오고, 채소 자체는 소금물에 침지(沈漬)되는 형태이거나, 동치미처럼 소금의 양이 많으면 마침내 가라앉는 형태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김치는 가라앉은 채소 곧 ‘침채’(沈菜)로 불리고, 침채가 ‘팀채’로, 다시 이것이 ‘딤채’로 변하고, 딤채가 구개음화하여 ‘김채’가 되었으며, 이것이 변해 오늘날의 ‘김치’가 되었으니, 김치가 중국으로부터 ‘김치 주권’을 회복하여 자기 이름을 갖기까지의 길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진다. 에 의하면 “주나라 문왕이 저를 즐겨 먹었다 하므로, 이 말을 들은 공자께서 주 문왕을 존경하는 나머지 모든 행위를 그를 따르기 위하여 콧등을 찌푸려가면서 저를 먹어서, 3년 뒤에는 이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2500년 전, 시어빠진 피클을 김치랍시고 상을 찌푸려가며 드시는 공자님의 모습과, 지난 봄 ‘사스’에는 김치가 특효라는 소문에 새콤매콤한 우리나라 김치를 허겁지겁 구해 먹어대는 공자님 후손들의 모습을 오버랩하며 상상해 보는 맛이 참으로 고소하다.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새콤매콤한 배추 물김치로 국수를 말아내는 ‘죽여주는 동치미 국수’(주인 이순명·031-576-4070)집이 있다. 얼음을 동동 띄운 새콤한 김치 국물에 쫄깃한 면발의 국수가 말아나오고, 여기에 다진 청양고추를 곁들여 먹으면 가슴속까지 시원해 무더위, 피로, 스트레스쯤은 이 한 그릇으로 ‘죽여준다’.



김학민 |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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