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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지] ‘싼 게 비지떡’이라고?

등록 2003-10-31 00:00 수정 2020-05-03 04:23

2천년 전부터 동양에서 재배된 ‘밭고기’ 콩… ‘등나무집’에서 비지에 존경을 표하라

중국의 화북 일대는 기름진 토지와 황하를 비롯한 풍부한 수원으로 일찍부터 농경문화가 싹트기 시작했다. 동한(東漢)의 역사가 반고가 지은 에 의하면 “농신(農神) 신농씨가 나무를 깎거나 휘어 쟁기와 보습을 만들고, 모든 풀을 먹어보고 평소에 늘 먹어도 해가 되지 않는 풀을 선택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을 재배하게 함으로써 농경을 번창케 했다”고 한다. 이때 온대지방에서 널리 자라고 있던 강아지풀을 재배하기 시작한 것이 조가 되었고, 야생의 기장과 남방으로부터 전해져온 벼도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여 농경생활이 꽃피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화북에서 싹튼 농경문화는 만주 우리 민족의 고토에도 파급되기 시작하였는데, 만주의 남부나 한반도는 화북지방보다 더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해 농경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 농경이 유목보다 안정된 식생활을 위해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로써 이들의 식생활은 유목의 육류 단백질·지방에서 농경의 전분 위주로 점차 바뀌게 됐다. 그러나 곡물 전분 위주의 식생활은 단백질과 지방의 결핍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야생동물을 가축화하고, 야생식물의 종자를 파종해보는 가운데 들콩의 작물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콩은 뿌리혹박테리아를 갖고 있어서 특별히 거름을 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재배가 쉬운데다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하기 때문에 유목에서 농경으로 옮겨가 육류 섭취가 줄어든 사람들에게 ‘밭에서 나는 고기’로 환영받았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콩을 재배해 식생활의 주요 재료로 쓰기 시작한 것이 2천여 년이 넘는 데 비해, 일찍부터 목축으로 육류 위주의 식생활을 영위해온 서양에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콩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유럽에는 1690년께 독일에 처음 전파되었고, 오늘날 전 세계 콩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미국에는 1804년께 처음 알려져 20세기 초에야 널리 재배되기 시작했으니, 단백질과 지방의 섭취원을 둘러싼 동서양의 간극이 이처럼 넓은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도 엄청나게 생산되는 콩의 대부분을 가축의 사료로 먹이고 있으니, ‘밭에서 나는 고기’를 ‘공장에서 나는 고기’로 바꾸고 있는 그들의 육류 집착에 혀가 둘린다.

콩은 콩밥과 같이 음식의 한 재료도 되나 그 자체로 하나의 식품이 되기도 한다. 곧, 삶은 풋콩은 그대로 간식거리, 술안주로 쓰이고, 간장에 졸여 콩자반이 되고, 발효시켜 된장·간장 등 장류를 만들어낸다. 분쇄하면 콩가루요, 용매로서 추출하면 콩기름, 물에 불려 추출하면 두유, 두부, 비지가 나온다. 비지는 두부를 만들고 난 찌꺼기다. 음식 이름을 고증한 에 “비지는 부재(腐滓)가 속전(俗傳)된 것이다. 곧, 두부(腐)의 찌끼(滓)다”라고 그 어원을 밝히고 있다. ‘싼 게 비지떡’이란 말처럼 비지는 말 그대로 한낱 찌꺼기일 뿐, 맛도 없고 그 속에 아무런 영양 성분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쉽다. 그러나 비지는 섬유질이 많고 단백질과 지방도 많이 남아 있으며, 특유한 풍미가 있어 찌개 형태로 조리하면 좋은 음식이 된다.

고려 말에 나옹선사가 월정사 북대암에 머무르고 있을 때, 나옹은 매일 비지로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어느 겨울 월정사로 가는 길가의 소나무가 가지에 얹혀 있던 눈을 비지 위로 떨어뜨렸단다. 나옹이 “이 산에 살면서 부처님 은혜를 입고 있거늘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고 호통을 쳤는데, 그 뒤부터 오대산에서 소나무가 떠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니. 당대의 고승 나옹이 ‘싼 비지’를 부처님께 올렸을 리 있겠는가?

경부고속도로 수원나들목 부근 경기도박물관 앞에 가면 맛있는 비지찌개집 ‘등나무집’(주인 유흥열·031-283-8705)이 있다. 흰콩을 물에 불려 믹서에 갈고 돼지고기와 시큼한 배추김치를 썰어 함께 넣고 미근하게 끓이면 구수한 비지찌개가 된다. 여기에 간을 맞추도록 파·마늘 다진 것, 깨소금, 고춧가루를 넣은 양념장을 쳐서 먹으면 밥 공기깨나 순식간에 비우게 되니, ‘싼 게 비지떡’이라 비웃을 자, 이 집을 가보라!

김학민 |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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