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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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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문제는 먹을거리다

등록 2003-11-27 15:00 수정 2020-05-02 19:23

연재를 마치며 풀어놓는 음식문화에 대한 단상…먹을거리에 인류평화의 문제가 놓여 있다

내가 음식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이다.당시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 등 일부 서구인들이 한국인들의 개 식용문화를 트집잡아 서울올림픽 보이콧 운동을 벌이던 때인데, 1980년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고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그들의 압력에 굴복해 1천년 이상 내려온 우리의 고유 먹을거리 문화 하나를 압살하려 했던 것이다.

남의 음식문화에 감놔라 배놔라?

먹을거리는 문화다. 그리고 역사다. 인류의 보편적 정서와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한 무엇을 어떻게 먹든 그것은 한 인간의 자유다. 또 어떠한 먹을거리를 어떻게 먹게 된 것은 그 민족(또는 개인) 고유의 살아온 환경과 문화 역사의 소산이다.

그러므로 어느 민족, 어느 개인이 자기 식의 먹을거리 관습을 다른 민족,다른 개인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거나 자기만의 잣대를 들이대 비판할 일이 아니다.그렇기 때문에 나는 거위의 입을 벌려 강제로 깔대기를 꽂고 사료를 막대기로 밀어넣음으로써 과식으로 부은 거위 간을 최고급 요리로 치는, ‘숲속의 뱀장어’라는 이름으로 은밀하게 뱀고기 요리를 즐긴, 파리 코뮌 당시 식량이 떨어져 개를 잡아먹은 바르도씨의 선조들과 그녀의 프랑스 동포들의 눈에서 ‘들보’를 찾아내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다.

나온 김에 좀더 이야기해보자.서구인들의 애완견 문화와 우리의 가축으로서의 개사육 문화는 그 출발점이 전혀 다르다. 서양은 사회경제적으로 목축 낙농이 발달해왔다. 그들 사회에서 개는 가축을 지키고 약간은 역축으로서의 역할도 한다. 곧 서양에서의 개는 인간의 경제활동에 보조 역할을 해온 조력자이고, 또 목축을 통해 개고기보다 더 좋은 육류 단백질을 생산해왔으므로 처음부터 식용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은 유목사회가 아니고 곡물 생산을 위주로 하는 농경사회이다.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다. 밭 갈고 논 갈고, 농작물을 운반하는 데 힘없는 개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또 개는 쥐, 바퀴벌레와 함께 잡식동물로 먹이를 놓고 인간과 경쟁관계를 형성한다. 풍년으로 오곡이 남아돌 때는 인간이 먹고 남은 찌끼로도 충분하지만, 연속된 흉년으로 인간이 기아에 허덕일 때 생산활동에 아무 역할도 못하고 식량만 축내는 개를 어찌할 것인가?

또 주거방식을 보더라도 서양은 입식으로 밖에서 그대로 신을 신고 거실, 식당, 심지어 침실까지 들어갈 수 있으니, 개 또한 집안에 들어와 살아도 조금도 어색할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 밖에서 돌아오면 신을 벗고 온돌방에 올라와 여러 식구들이 오밀조밀 모여앉아 밥먹고 이야기하고 이불 펴고 자는데, 여기에 우리의 재래종 개가 끼어들어 애완용으로 될 수 있겠는가. 곧 지금의 시각에서 개 식용문화를 왈가왈부하기에 앞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그 민족 특유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의식주’라고 하여 인간의 원초적 문제들을 서열화하였지만, 그건 어느 정도 문명화된 시기의 이야기이고, 먹을거리를 먹어서 생명을 보존하고 짝을 맺어 후손을 퍼뜨리는 일이 인간의 가장 근원적 본능일 것이다. 그리고 이 근원적 본능은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조절되어 질서와 규범 속에서 평화롭게 융화, 발전돼가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아침마다 신문 사회면을 펴보라. 숱하게 등장하는 범죄기사들의 행간을 뜯어보면 그 이면에는 결국 먹는 문제가 개재되어 있고, 국가간 전쟁, 민족간 분쟁도 영토나 자원의 문제가 대부분을 차지하니, 그 끝을 파보면 결국 먹는 문제가 아닌가?

요즘 우리 사회는 생산력의 발전으로 먹는 문제에 그리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울 강남의 백화점에서는 몇백만원짜리 굴비 선물 세트가 불티나게 팔리는가 하면, 일반 주부들은 재래식 시장에서 콩나물 1천원어치를 놓고 좌판 할머니와 실랑이를 벌인다. 산기슭 빈민동네에서는 녹슨 수도관에서 나오는 수돗물조차 졸졸대어 갈증을 못 푸는가 하면, 강남 고급 아파트촌에서는 페트병 하나에 1만5천원짜리 일제 해저 심층수를 마시지 못하면 팔불출이란다. 변두리 인생들은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한 사발 들이킨 뒤 ‘컥’ 하고 기분 좋게 트림하고 나오는가 하면, 흥청망청 인간들은 청담동 고급 카페에서 프랑스 포도주업자들의 영악스런 상술에 속아넘어가 2003년산 보졸레 누보를 홀짝이며 잘난 척한다.곧 계층간에 먹을거리의 분배를 둘러싼 양적 갈등은 줄어들었으되, 먹을거리의 질과 특정 먹을거리의 독점을 둘러싸고는 계층이 분화되고 있는 것이다.

양적 갈등 대신 질적 갈등

먹을거리는 나눔이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사람은 물론 개를 옆에 두고도 혼자 먹지 않았는데, 이는 문명국가, 문화인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 식량을 지원하는 것도 같은 소이인데, 반공 이데올로기, 정쟁적 관점으로 이를 문제 삼고 비난하는 일부 인사들의 행태가 한심하다. 역지사지해보라. 이유야 어찌됐든 우리가 굶어죽고 있는데, 북한 사람들이 흥청망청 먹고 마신다면, 그리고 이역만리 떨어진 세계인들조차 인도적 관점에서 북한에 식량 원조를 하는데, 휴전선 넘어 지척의 우리만 눈가리고 있다면 과연 마음이 편할까?

우리의 식탁문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것이 있다. 옛날에는 식사시간에 되도록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빨리 끝내는 것이 예절이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가정에서야 각기 다른 분위기와 관심사를 갖고 식사시간을 보내겠지만, 손님을 초대한 자리나 여러 사람이 어울리는 회식은 다양한 화제를 나누는 즐거운 자리여야 한다. 서구인들의 경우 대개 음식이나 술 이야기, 축구와 같은 스포츠, 여행, 그리고 조금 고상하다면 음악·문학·그림 등 예술 이야기로 서너 시간을 채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직장의 일 이야기, 정치 논쟁 등으로 침을 튀기다가 어떤 때는 다툼 끝에 즐거워야 할 자리가 영 썰렁하게 변하기도 한다.

나는 이 때문에 ‘김학민의 음식 이야기’에서 오밀조밀 음식 조리하는 방법이나 어설픈 영양학 강의, 또는 특정 식당에 대한 ‘정실성’ 선전보다는 먹을거리를 낳게 한 사회문화적 배경, 그리고 음식과 식당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소개함으로써 식탁의 화제를 제공해보려 하였다. 그리고 나는 잊혀지고 묻혀진 우리 문화유산들을 발굴해 재미있고 해박하게 소개함으로써 전통 문화유산을 대하는 우리들의 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유홍준 교수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먹을거리 또한 “아는 만큼 맛있다”고 믿는다.

이번호로 ‘김학민의 음식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천학비재한 탓에 호랑이를 그리려다가 고양이를 그리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의욕은 높았으되 시간과 능력이 따라가지 못했음을 독자 여러분께 고백한다. 된장, 젓갈, 김치, 술 등 우리 민족의 4대 발효식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식물을 먹을거리로 삼는 우리의 나물 이야기, 해장국, 정력식품에 대한 집착, 음주문화, 쌀밥과 곡령숭배, 죽, 라면, 세시음식 등은 우리의 먹을거리 문화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었지만 끝내 다루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육류 단백질 신화를 확대재생산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이익의 극대화를 관철해가는 켄터키 치킨 등 미국 패스트푸드들도 써보려 했으나 기회를 갖지 못했다. 또 우리와 가까운 몇몇 나라들의 음식도 소개해보려 했지만 견문이 짧은 탓에 불가능했다. 손가락, 수저, 포크, 나이프 등 식사 도구의 발전과정을 정리하지 못한 것도 이쉽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음 기회로 미룬다.

탐내지 않는 것, 나누는 것!

먹을거리에서 인류 평화를 이야기한다면 너무 거창할까? 아니다. 인류가 모두 굶주리지 않는 것, 저 혼자 배부르자고 남의 먹을거리를 탐내지 않는 것, 혼자만 독식하지 않고 골고루 나눠먹는 것, 그리고 자기의 관습과 다른 먹을거리를, 먹는 것을 존중하는 것 등 인간의 근원적 욕망인 먹고사는 문제, 먹을거리 문제에 대해 인류가 서로 양보하고 관용할 때 평화는 정착되리라 확신하면서 ‘김학민의 음식 이야기’를 마친다. 관심을 갖고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김학민 | 학민사 대표 · 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 다음호부터 ‘성석제의 먹을거리 생각’이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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