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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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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나, 서로 놀라고

등록 2024-06-14 19:24 수정 2024-06-19 15:25
두렵고도 아름답다면 바로 너희들일 거야. 너희의 매끈한 몸과 치명적인 독은 눈길을 사로잡지. 두려운 존재였기에 마구잡이 죽음도 맞아야 했던 너희들. 시인의 입을 빌린 죽은 뱀이 노래하더라.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랄 때, 뱀이야말로 소스라치게 놀랐노라.’고. 그래, 서로 침착해야 해. 2010년 인천 강화군 말도.

두렵고도 아름답다면 바로 너희들일 거야. 너희의 매끈한 몸과 치명적인 독은 눈길을 사로잡지. 두려운 존재였기에 마구잡이 죽음도 맞아야 했던 너희들. 시인의 입을 빌린 죽은 뱀이 노래하더라. ‘사람이 소스라치게 놀랄 때, 뱀이야말로 소스라치게 놀랐노라.’고. 그래, 서로 침착해야 해. 2010년 인천 강화군 말도.


두려움, 그것은 살아 있는 모든 동물이 계속 살 수 있게 돕는 고마운 감각이다. 지능 높은 동물일수록 두려운 존재의 회피를 통해 생명을 부지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어떤 두려움은 새로 학습해야 하지만, 많은 두려움은 오랜 진화의 여정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유전자에 깊게 새겨진다. 이를테면 뱀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 그렇다.

동물학자들의 관찰에 따르면, 뱀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동물들조차 뱀을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계하고 달아난다. 뱀을 두려워할 줄 아는 녀석들이 종족 보존에 유리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뱀을 향한 두려움과 경계와 저주는 동서고금의 문헌에도 빼곡하다.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성경의 첫 장에도 뱀이 똬리를 틀고 있지 않은가.

예외도 있다. 아프리카 벌꿀오소리는 뱀을 보고 달아나기는커녕 반색한다. 맹독성 코브라에게 물리고도 끝내 뱀을 꿀꺽하고 한숨 자고 나면 언제 물렸냐는 듯 가뿐하다니 이 녀석에게 ‘두려움’이란 무엇일까.

시인 함민복은 ‘죄와 선물’이라는 글에서 “보이지 않는 것 중에는 전기가 제일 무섭고, 보이는 것 중에는 뱀이 제일 무섭다”고 고백했다. 그의 기억에는 “잠에서 깨 물 먹으러 가려다가 방에 들어온 뱀을 밟아 돌아가신 작은아버지, 개암 따 먹으러 갔다가 뱀에 물려 죽은 고향 선배, 논두렁에서 뱀에 물려 퉁퉁 부은 다리를 새끼줄로 묶고 리어카를 탄 채 보건소로 가던 고향 아주머니”가 선하다.

어느 날 시인은 밭둑길에서 뱀과 마주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반사적으로 피하면서 나무 작대기를 잡는다. 돌 틈으로 기어들어가려는 뱀을 민첩한 동작으로 짓누른다. 뱀은 꼬리 잘린 채 달아난다. 며칠 뒤 죽은 뱀을 봤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상념에 잠긴다. 그때, 죽은 뱀이 시 한 수를 들려준다. 시인은 받아 적는다.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뱀이 흔하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귀해졌다고 한다. 맞는 말이겠으나, 여전히 농촌에는 뱀이 많다.

얼마 전 마당에 큰 뱀이 들어왔다. 옆지기가 먼저 발견했고,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개와 아이를 집으로 피신시킨 뒤 장화를 신고 두꺼운 장갑을 낀 채 뱀몰이에 나섰다. 뱀은 돌 틈을 찾아 요리조리 잘도 숨어들어갔다. 결국 잡았는데, 집게로 머리를 누르고 맨손으로 만져본 녀석의 몸은 서늘했다. 몸통을 비트는 힘이 대단했다. 고사리 삶는 들통에 넣고 뚜껑을 꼭 닫은 채 인적 드문 산속에 녀석을 풀어줬다.

마당에서 잡은 뱀을 풀어줬다 하니 한마디씩 안 거드는 사람이 없었다. 왜 뱀을 죽이지 않고 놓아줬느냐는 타박, 그거 팔면 돈이 얼만데 하는 아쉬움, 술을 담그지 그랬느냐는 제안, 왜 하필 더럽게 음식 끓이는 들통에 넣었느냐는 질책까지.

죽는 두려움이 물러가자 죽이는 두려움이, 뱀처럼 기어들어왔다고는 차마 답하지 못했다.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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