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캘빈클라인이 최근 공개한 보이그룹 SF9 출신 배우 로운의 자사 속옷 화보 일부. 캘빈클라인 누리집 갈무리
우로보로스라는 뱀이 있다. 머리가 자신의 꼬리를 먹어치우는 모습을 하고 있는. 탈피하고 새롭게 태어나는 파충류의 특성 덕분에 우로보로스는 영원이나 불멸, 혹은 윤회를 상징하는 존재라고 믿어왔다. 근사하다. 하지만 오늘 이 글은 우로보로스의 의미가 아니라 외형만을 빌려 쓸 생각이다. 자기 자신을 공격해 끝내 집어삼키고야 마는 우로보로스의 모습만큼이나 억압과 차별의 속성을 잘 드러내는 이미지가 드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서둘러 먼저 털어놓자면 이것은 제모에 대한 이야기다. 여름과 잘 어울리는 시의적절한 주제이지만, 사실 별로 다루고 싶지 않았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은 미에 대한 강박이 심한 사회다. 성형 강국임과 동시에 미용 산업에 쏟는 에너지도 엄청나다. 전세계적으로 급성장하는 케이팝 산업 역시 예외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케이팝의 주요 요소를 안무나 음악, 뮤직비디오 정도라고 생각하지만 보이지 않는 이면에서 이 산업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은 의외로 미용의료와 뷰티 산업이다. 케이팝은 눈으로 보는 음악이고 아이돌의 아름다움은 팬덤 유입의 가장 강력한 힘이니까. 이 영역만큼 한국인들의 외모에 대한 높은 기준을 잘 드러내는 산업도 없을 것이다.
케이팝 인기가 높아지면서 글로벌 팬덤 사이에서도 미의 기준이 엄격해지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방탄소년단(BTS) 멤버를 닮고 싶어서 수십 번의 성형수술을 감행한 한 외국 팬의 사례가 유별난 기행 정도로 받아들여지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수많은 쇼츠와 릴스에서 케이팝적 아름다움의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노력하는 서구 팬들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식 의상과 메이크업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과 비슷하게 외모를 꾸민 외국 팬들을 마주하다보면 기묘한 자부심과 함께 이래도 괜찮을까 하는 마음이 동시에 고개를 들곤 한다. 그러니까 이 강렬한 외모 강박 문화를 이대로 수출해도 괜찮은지 싶은 것이다.

2025년 5월3일 문화방송 <쇼!음악중심>에 출연한 남성 아이돌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TXT)가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문화방송(MBC) 제공
한국 여성들은 어려서부터 외모에 관한 강한 사회적 압력을 받으며 성장한다. 체중, 이목구비, 어깨너비, 다리 길이, 얼굴 크기처럼 매우 정교한 기준들이 미의 표준으로 정립됐고 이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여성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빈번하고 극단적인 다이어트, 더 자연스럽게 자리 잡도록 이른 시기에 단행하는 성형수술,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잘록한 허리와 잘 빠진 다리 라인을 만들기 위한 운동까지 여성들이 높은 미의 기준선을 통과하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이 많아도 너무 많다. 그리고 이 까다로운 관문 중에서 가장 은밀하고도 끈질긴 영역이 바로 ‘제모’다.
인간의 몸에는 털이 존재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부터 남성호르몬의 흔적이 없는, ‘털 없는 신체’에 대한 한국 사회의 선호가 가시화하기 시작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을까? 딱히 중요한 변곡점이 떠오르진 않지만 분명한 것은 1990년대 이전까지는 흔치 않았던 제모가 이제는 에티켓으로 일상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초창기에는 저항도 거셌다. 왜 인간의 자연스러운 형태인 털을 유독 여성만 제거해야 하는가? 여성은 겉으로 드러나는 털을 제모하지 않는 방식으로 반발했다. 여성 신체를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것으로 인정하라는 항의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제모 산업의 공세는 매서웠다. 여성잡지와 수많은 매체가 어떻게 제모를 깔끔하게 할 수 있는지, 센스 있는 옷차림을 위해서는 어느 부위를 제모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제안(이라 쓰고 세뇌라고 읽는다)했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 등장하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워 보이는 여성 인물들조차 데이트 전에는 제모하느라 정신없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주인공 캐리의 아름다운 의상들을 보는 즐거움에는 그의 매끈한 겨드랑이도 한몫했던 셈이다. 여성의 체모는 관리되지 않은 게으름의 증거이자 성적 매력을 떨어뜨리는 감점 요소로 여겨졌고, 끊임없이 사회적 압력에 노출된 여성들은 점차 털 있는 신체를 더러운 것이라고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여성들은 겨드랑이 제모만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브라질리언 왁싱을 하며 신체를 정돈한다. 심지어 인중의 털은 물론이고 얼굴 전체의 솜털도 화장이 더 잘 먹도록 전부 밀어버리는 게 힙한 메이크업 스킬로 소개되고 있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거다. 크고 작은 저항의 흔적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결과적으로 여성들은 완전히 투항했다. 제모의 세계로. 스스로. 기꺼이. 매끄러운 신체를 향한 선망을 향해. 그러니까 여기까지는 여성주의가 제모에 참패한 연대기라고 할 수 있다.

2010년 개봉한 영화 ‘섹스 앤더 시티 2’의 한 장면. 영화 <섹스 앤 더 시티2> 공식 이미지.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하지만 세상사는 언제나 매우 기묘한 방식으로, 예측 밖으로 움직인다. 무모의 신체를 아름다움으로 내면화한 여성들이 이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하다 못해 마침내 남성의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기 시작했다. 제모의 역습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털 없는 신체가 지극한 아름다움의 기준이 돼버렸는데 이 잣대를 타인의 아름다움을 판별할 때도 들이대지 않을 수 있을까? 숭숭 털이 난 다리와 수영장에서 마주치는 털 있는 몸에 대한 여성들의 혐오감은 타고난 게 아니라 그렇게 주입된 것이다. 자기 몸조차 혐오하는데 타인의 몸에 관대할 리 있나. 여성들은 이제 털 있는 남성을 밀어내고 있다. 이런 변화의 징후를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곳이 바로 케이팝 산업이다.
전술했다시피 케이팝은 아름다움에 민감한 영역이고 특히 주소비자인 여성의 니즈(요구)를 기민하게 파악해서 활용하는 산업이다. 체모에 대한 여성들의 비선호는 아이돌에게도 직접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제모를 요구받아온 여성 아이돌과 마찬가지로 남성 아이돌에게도 제모에 대한 압박이 시작됐다. 실제로 다양한 방송 속에서 효과적인 제모법을 공유하는 남성 아이돌의 모습은 점점 더 쉽게 포착되고 있다. ‘병원에서 수염 레이저 제모를 받았는데 너무 편하다’ 같은 대화가 오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얼마 전 제모하지 않은 채 광고를 촬영한 아이돌 출신 남성 모델에 대한 팬덤의 부정적 반응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관련 기사에는 돈을 받고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아이돌이 겨드랑이를 제모하지 않은 것은 자기 관리에 실패한 것이라는 날카로운 반응이 뒤따랐다. 여성에게는 깨끗한 신체를 요구하면서 남성에게는 관대한 이중 잣대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됐다. 무엇보다 애초에 털은 더러우니 지면에서 보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속적으로 털 없는 신체를 아름다운 것으로 주입받아온 여성에게는 남성의 체모 역시 자연스러운 신체의 일부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던 억압이 마침내 먼 길을 돌고 돌아 남성을 향하고 있다. 원피스를 입고도 제모하지 않은 여성에게, 치마를 입고도 다리털을 밀지 않은 여성에게 가해지던 엄격한 평가의 시선이 이제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털 있는 남성을 향하고 있다. 케이팝 산업에서 드러나는 이 독특한 변화의 모습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될 역습의 예고라면 매끈하게 관리된 팔과 다리, 깨끗한 겨드랑이는 점점 더 강력하게 매력적인 남성의 조건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아이돌만이 아니라 일반 남성들에게도 요구되는. 여성이 자신에게 요구돼온 가혹한 미의 기준을 역으로 이성에게 적용하면서 남성에게 가해지는 외모에 대한 사회적 압력도 급증하고 있다.
전부터 여성 신체에 대한 억압을 멈추라고 하는 이유는 이와 같다. 억압과 차별은, 그리고 더 나아가 혐오는 특정 대상에 영원히 고정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절대 그럴 수 없다. 흑인은 차별해도 된다는 말은 인간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명제를 아주 쉽게 파쇄한다. 결국 그 말은 특정 조건이 갖춰졌다면 어떤 인간은 차별해도 된다는 의미가 되니까. 논리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차별하면 안 된다’는 문장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적용돼야 한다. 그래야 진리가 된다. 더욱이 인류의 역사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매우 유동적으로 변동하며 발전해왔다. 억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투쟁하는 인간의 의지는 매우 끈질기고 강력해서 피지배층은 언젠가는 힘을 길러 위계를 전복한다. 그게 역사의 경향성이다. 그러니까 영원히 특정 대상에만 가해지는 억압이란 없는 것이다.

2025년 8월2일 문화방송 <쇼!음악중심>에 출연한 남성 아이돌 그룹 더보이즈(THE BOYZ)가 무대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문화방송(MBC) 제공
차별과 억압 경로는 우로보로스의 뱀처럼 결국 자기 꼬리를 먹고 들어가며 전 존재를 위협하기 마련이다. 적절한 순간, 타자가 처한 문제를 자기 것으로 적극적으로 인지하고 함께 투쟁하지 않는다면 끝내 마지막 순간 그 칼날이 자신을 겨누게 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사회적 문제가 바로 이 우로보로스의 형상을 하고 우리 뒤를 덮쳐온다. 먹히고 있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주민에게는 그래도 돼, 성소수자에게는 그래도 돼, 여성에게는 그래도 돼 하며 야금야금, 조금씩 잠식당하다보면 결국 이 뱀은 우리 모두를 남김없이 먹어치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우로보로스의 머리에서 꼬리를 빼내기 위해서는, 그래서 뱀도 우리도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타자를 향하는 억압과 차별을 기민하게 감지하고 함께 고민해야 한다. 어차피 언젠가는 내게 돌아올 문제이므로 지금 여기에서 함께 이야기하고 정리해야 한다.
그러니 우로보로스의 뱀이 원래 의미대로 영원과 불멸이라는 근사한 관념을 상징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털 없는 신체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멈춰서 같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케이팝이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은 좋지만 체모 없이 매끈한 피부만이 아니라 극도로 마른 몸, 뼈를 들어내야 얻을 수 있는 얄팍한 턱처럼 심각한 변형과 관리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인공적 아름다움이 성별을 불사하고 보편적 미의 기준이 돼가는 지금, 이대로 우리 정말 괜찮은 거냐고.
Soulblue PD·‘슬램덩크 좋아하세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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