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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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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간 쌓아올린 또다른 세계… <율리> 돌배

돌배② 3년간 용만 그리던 애니메이터에서 만화가로 …속 깊은 ‘힐링툰’ 의 대명사
등록 2024-05-18 07:20 수정 2024-05-23 06:12
2024년 2월28일 서울 마포구 한 작업실에서 웹툰작가 돌배를 만났다. 류우종 기자

2024년 2월28일 서울 마포구 한 작업실에서 웹툰작가 돌배를 만났다. 류우종 기자


◆<샌프란시스코 화랑관><헤어진 다음날, 달리기><<율리> 돌배 작가의 이야기가 앞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왜 안 달려?” 대표 힐링툰 작가 돌배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25.html)

연재 중인 <율리>는 에스에프(SF·과학소설) 장르 작품이에요. 이전 작품과 달리 세계를 통째로 창조하고 있습니다. 이전 작품들의 작업과는 많이 다를 것 같아요.

“이전에 했던 작품들은 현실 세계와 맞닿는 부분이 있어서 작품 속 세계를 많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런데 <율리>는 새로운 세계라서 설정이 세세하게 들어가야 하죠. 새로운 세계를 만들 땐 내가 만든 세계 안의 요소들끼리 충돌하지 않도록 정합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실제 우리가 사는 현실과도 완전히 괴리되지 않아야 해요. 현실과 닮은 부분이 하나도 없으면 독자들이 감정 이입할 수 없거든요.

세계를 만드는 데도 법칙이 있어요. 의복, 건축, 도량형, 경제, 언어 순서대로 세계를 쌓아 올리죠. <율리>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생각한 작품이라 기획 기간이 15년 정도 돼요. 이제 웹툰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작화 속도가 늘었기 때문에, 지금이라면 할 수 있겠다 싶어서 도전했어요.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처럼,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작업을 언제나 열망했거든요.

현실 속에서 <율리>가 참조한 곳은 몽골, 티베트거든요. 원래 <율리>를 시작하기 전에 자료 조사차 몽골이나 티베트로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면서 그게 안 됐어요. 그리고 우리나라엔 생각보다 몽골, 티베트와 관련한 자료가 거의 없더라고요. 만족할 정도로 자료를 얻지 못한 채 연재를 시작하니 작업이 너무 어려웠어요.”

<율리>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에 방점을 뒀나요?

“일단 <율리>는 로드무비예요. 여행을 떠나는 게 가장 핵심인데, 거기에 변성이라는 주제를 넣어봤어요. 현실에서 변성은 사춘기 때 소년들의 목소리가 변화하는 걸 말하지만, <율리>에선 성별이 변화하는 것을 뜻하죠. 그중에서도 주인공인 율리는 여행 과정에서 남성으로, 또다시 여성으로 성별이 바뀌고요. 사실 이건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모두의 성별이 그렇게 자주 바뀌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사는 곳 안에서도 XY, XX 염색체뿐만 아니라 XXY, XXX 등 여러 염색체가 있고, 성(gender) 역시 다양하고요.

변성(성별이 바뀌는 것), 미성(성별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 등 현실에선 생소할 수 있는 성에 대한 이야기가 <율리> 안에 존재하지만, 무엇보다 이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 성이 변하네. 그래서 뭐? 하는 느낌으로요. 성별이 변하는 것도, 아직 성별이 없는 것도, 남성인 것도, 여성인 것도, 그냥 자연스러운 일인 거죠, <율리>의 세계에서는.”

돌배 작가가 인터뷰 도중 <율리>의 주인공 율리를 그리고 있다. 류우종 기자

돌배 작가가 인터뷰 도중 <율리>의 주인공 율리를 그리고 있다. 류우종 기자


노력파 만화가의 창작 공부

이야기를 문득 떠올리는 편인가요? 달리다가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를 기획한 것처럼요.

“아이디어는 그럴지 몰라도, 이야기는 그렇지 않아요. 실은 아이디어조차도 머릿속에서 모두 꺼내놓는 작업을 먼저 하는 편이에요. 저만의 방식이 있는데요. 일단 머리를 맑게 유지한 상태에서 집중해서 종이에 단어들을 계속 적어요. 머릿속의 어떤 필터도 거치지 않고 일단 쓰는 거죠. 1초에 하나씩 단어를 계속 적고, 단어를 분류해서 묶고, 좋은 키워드가 나오면 또 동그라미 친 뒤 서로 연결하고요. 이런 식으로 아이디어를 찾고 모으다보면 마음에 드는 게 나와요. 그러면 그걸 다시 적어놓고, 그게 모여서 소재가 되고, 나중에는 이야기가 되죠.

어느 날 길 가다가 번개 치듯 영감이 떠오르는 편은 아니에요. 대신 노력을 많이 했어요. 하나의 작품을 기획할 때 평균 1년 정도 잡고 공부하거든요. 박물관이나 미술관, 도서관 등 돌아다니면서 최대한 많은 것을 머릿속에 넣어두려 해요. 작법서도 많이 읽는 편이에요. 배운 대로 표현해보려고 연결도 많이 해보고, 그동안 모은 여러 정보도 많이 넣어보고요. 예를 들어 <계룡선녀전>은 전형적인 3막 구조의 스토리텔링이에요. 여기에 픽사에서 제시하는 작법 구조, 예컨대 도입부에는 어떤 감정이 들어가야 하는지 등 설명한 이론이 있어서 그걸 학습해서 작품 안에 녹였죠. 제가 배운 것을 가능한 한 많이 활용하려 해요.”

만화를 그릴 때 생각하는 작가님만의 원칙이 있나요?

“재밌는 걸 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건 하지 말자. 시간 낭비, 종이 낭비 하지 말자. 이렇게 꼭 생각해요. 무엇보다 손목, 척추 건강 때문에 작가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몇 년 안 남은 것 같더라고요. 예전에 천계영 작가님이 하신 말씀을 얻어들은 적이 있는데, 작가님이 나이가 들어 아이디어가 없어지거나 생각이 늙으면 어떡하지 걱정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나이가 드니 손목터널증후군과 허리디스크가 더 문제였다고. 정말 공감해요. <율리>를 시작한 것도 건강과 관련이 있어요. 오래 꿈꿔온 작품을 하려면, 무엇보다 손목이 망가지기 전에 시작해야 했으니까요.”

어렸을 땐 만화가 되는 걸 주변에서 만류했다고 했잖아요. 지금은 만화가라는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어려운 점이 있기는 하죠. 휴재 기간엔 수입이 없으니 경제적으로 불안하기도 하고요. 특히 연재는 장기 레이스이기 때문에 연재를 시작하면 매번 체력이 달리고 한계를 느끼기도 하지만, 하다보면 나름의 요령을 또 터득하는 것 같아요. 최근에 저는 주간 연재 대신 한 달에 4~5화를 만드는 월간 연재로 바꿨어요. 그게 제 루틴에 훨씬 잘 맞더라고요.

작품이 잘 안 나올 땐 자책하다가 작품이 잘 나오면 뿌듯하고, 아무래도 왔다 갔다 해요. 그래도 내가 봐도 작품이 정말 재밌게 잘 나왔다 싶은 날엔 으쓱해지는데, 여기에 더해서 독자들이 그 장면 너무 좋았다고 피드백해주면 정말 행복하죠. 제가 다른 직업을 갖고 있었다면 이런 피드백을 어떻게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런 점에서 기쁨이 많은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에필로그

<슬램덩크> <하이큐> 등 지금까지 스포츠를 다룬 만화를 수도 없이 읽었지만, 운동해야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앉아 있는 나를 비로소 달리게 한 건 돌배 작가의 작품이 유일하다. 게다가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 <샌프란시스코 화랑관>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이런 고백을 하는 게 나뿐이 아닌 듯하다. 일반적인 스포츠 만화에서는 주로 타고난 천재성, 혹은 혹독한 연습 끝에 올라서는 숭고한 경지를 그려내곤 한다. 그러나 돌배 작가의 만화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통해 하루하루 조금씩 다져지는 생활 속의 스포츠를 그린다. 이를 악물고 도전하지 않아도, 수많은 땀과 노력을 갈아 넣지 않아도 누구든 차근차근 다가갈 수 있는 미래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에는 하나의 분야를 고집스럽게 사랑하고 성실하게 파고드는 마음이 듬뿍 담겨 있다. 태권도와 달리기에 대한 애정, 몰입도 높은 스토리텔링을 위한 노력, 만화에 대한 깊은 사랑까지도. 그래서 독자들은 그 모든 마음을 솜씨 좋게 이어받아 그의 작품을 다정한 용기와 위로의 만화로서 번역했던 걸까. 그러니 현실이 무거워 주저앉은 이들이 있다면, 돌배 작가의 만화를 권하고 싶다. 그의 작품 세계 안에선 그 누구라도 다시 달릴 수 있으니까.

조경숙 만화평론가 

*‘한겨레21이 사랑한 웹툰 작가’ 21명을 인터뷰한 ‘21 라이터스 ④’는 한겨레 네이버스토어에서 낱권 구입할 수 있습니다.https://smartstore.naver.com/hankyoreh/category/263adeff1d78477097022d4d89153abc?cp=1

작품목록

<샌프란시스코 화랑관> 2013년 11월6일~2016년 3월9일 네이버웹툰에 연재. 돌배 작가의 데뷔작이자 ‘2017 오늘의 우리만화’ 선정작. 미국에서 타향살이하는 ‘가야’의 향수병 극복을 위한 태권도 입문기.

<계룡선녀전> 2017년 3월1일~2018년 3월14일 네이버웹툰에 연재. 고전설화 ‘선녀와 나무꾼’을 재해석한, 선녀 바리스타의 ‘신랑 찾기’ 여정. 2018년 tvN에서 드라마로 제작돼 방영됐다.

<헤어진 다음날, 달리기> 2017년 9월6일~2018년 8월12일 저스툰에 연재. 달리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 무려 100㎞에 이르는 ‘울트라 마라톤'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율리> 2021년 2월19일부터 네이버웹툰에 연재 중.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가상의 국가, ‘함백’에서 시작되는 신비로운 여행기.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동양 판타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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