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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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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파’ 손님까지 유혹하는, 여기가 비건식당?

발효한 식물 재료로 ‘단짠단짠’ 요리 선사 ‘천년식향’의 변혜정·안백린
등록 2023-10-20 13:45 수정 2023-10-26 04:22
발효를 통해 채소 본연의 맛을 재해석한 요리를 내놓는 발효 바 ‘천년식향’을 운영하는 모녀 변혜정(오른쪽)씨와 안백린씨.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발효를 통해 채소 본연의 맛을 재해석한 요리를 내놓는 발효 바 ‘천년식향’을 운영하는 모녀 변혜정(오른쪽)씨와 안백린씨.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2023년 10월15일 일요일 오후 3시30분. 발효 바(bar) ‘천년식향’의 브레이크타임(쉬는 시간)이다. 안백린 셰프가 음식이 담긴 팬 10여 개를 높이 쌓아 나르고 있었다. 이틀 뒤 예약한 단체손님을 위해 밑작업을 한 요리다. 그는 함께 일하는 직원과 팬 10여 개를 더 나른 뒤에야 쉴 수 있었다. 입구에는 “직원 복지를 위해 브레이크타임을 지켜주세요”라고 손님을 향해 써두었지만, 정작 지키기가 쉽지 않다.

천년식향은 제철 채소 등 순식물성 재료를 발효해 맛을 끌어올린 요리를 내놓는 식당이다. 다만 음식에 곁들일 와인 등 음료 주문이 필수이기에 ‘바’라고 설명해야 한다. ‘식당’인데 ‘와인 필수’를 말하면 손님들의 비난이 빗발친다.(술을 못하는 경우 논알코올 칵테일을 고를 수 있다.) 와인은 유기농 포도를 일체의 화학물질을 첨가하지 않고 발효해 만든 ‘내추럴 와인’만 판다. 2020년 문을 연 이곳은 초기에는 “비건(채식) 식당”이라고 정체화했지만, 지금은 “비건 여부는 비밀”이다. 성정체성을 표기할 때 남성, 여성 외에도 ‘밝히지 않겠다’(Rather not say) 항목이 있듯이 “비건 카테고리화에 저항한다”는 의미다.

식당의 낯선 ‘규칙’에 물음표가 자꾸 생긴다. 왜 비건 여부는 비밀이지? 음료 필수는 너무한데? “대한민국에서 비건 자영업을 하는 건 미친 짓일지도 모른다”며 3년의 분투를 책 <불편한 레스토랑>에 담아낸 모녀 변혜정씨와 안백린씨를 만나 낯선 규칙의 이유를 물었다.

콩고기를 다양한 소스와 양파 크리스피, 고추 부각 등을 곁들여 다층적인 맛을 내는 천년식향의 ‘섹스 앤드 스테이크’. 천년식향 제공

콩고기를 다양한 소스와 양파 크리스피, 고추 부각 등을 곁들여 다층적인 맛을 내는 천년식향의 ‘섹스 앤드 스테이크’. 천년식향 제공

섹슈얼리티 전문가 엄마, 동물해방운동가 셰프

엄마 변혜정씨는 여성학자로 젠더, 성평등 등을 주제로 대학에서 강의하고 책을 썼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 등 공공기관장도 지냈다. 나누자면 ‘대접받는 쪽’이었고, 주로 앉아서 일했다. 지금은 ‘섹스앤드스테이크연구소 소장’이라 적힌 황금빛 이름표를 달고 천년식향에서 음식을 설명하고, 음식을 나르고, 빈 접시를 치운다. 소믈리에 자격증을 보유하고 섹슈얼리티 전문가로 음식에 이야기를 입히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몸으로 일한다. 그리고 손님을 ‘모신다’.

딸 안백린씨는 영국에서 의료생물학을 공부하고 ‘정신건강, 식품-생명의 연결성’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전공을 통해 채소가 건강에 얼마나 이로운지, 반대로 육식이 장내 유해균, 우울감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늘 접했다. 동물이 단지 인간을 위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에 문제를 느꼈다. 한때 고기를 보관하는 냉장고를 ‘시체보관소’라고 부르며 집 냉장고 속 고기를 죄다 내다 버려 아빠와 갈등을 빚기도 한 ‘과격 동물해방운동가’였다. 의학 공부를 하다 말고 인간과 동물 모두 행복한 식생활을 고민하며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에서 요리를 배웠다. 지금은 “비건이 아닌 분들이 한 끼라도 맛있게 채소 중심 요리를 먹는 것”이 목표가 된, ‘유연한 요리사’가 됐다.

첫 번째 물음표. 분명 순식물성 재료로만 만들어진 요리를 파는데, 왜 ‘비건 식당’이라는 분류를 거부할까. 안백린 셰프는 말한다. “채소는 ‘심심하다’ ‘맛없다’ ‘초록색이다’ ‘메인 요리가 될 수 없다’ 같은 편견이 비건 요리에 많은 제약을 가해서, 오히려 비건을 시도하는 데 장벽이 되는 것 같아요.” 변혜정씨도 덧붙인다. “우연히 방문한 손님들에게 메뉴를 설명할 때 ‘비건 요리’라고 하면 난색을 표하고 나가는 경우가 많아요. ‘비건이 괴물도 아닌데 왜 그러시냐’ 따라 나가서 묻고 싶은 적도 많았죠.”

직접 개발한 대체육

직접 개발한 대체육

수시간 정성 들여 심심함 대신 강렬한 맛, 와인은 필수

안백린 셰프는 편견에 갇히지 않고 비건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요리를 개발했다. 맛은 강렬하고 색은 다양하다. 이름에서 ‘미친’과 ‘풍부한’이라는 두 개의 형용사를 함께 사용한 ‘크레이지 리치 파스타’(Crazy Rich Pasta)는 요즘 유행하는 ‘단짠단짠’이 폭발하는 맛이다. 사과와 식물성 고기를 잼처럼 될 때까지 5시간 이상 저온에서 졸인다. 여기에 강한 불을 가해 당의 화학반응을 일으켜 주로 육류에서 일어난다는 마야르 반응을 일으킨다. 풍미가 배가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과미트잼 소스에 코코넛을 넣고 다시 졸여 코코넛의 달짝지근함을 더한 ‘단짠단짠 소스’를 고둥 모양 파스타인 셸 파스타에 넣는다. 고둥 안에 소스가 가득 고여 더욱 강렬하다. 이 요리에는 초록색이 하나도 없다.

이름에 스테이크가 들어가서인지(섹스가 들어가서인지) 인기가 많은 ‘섹스 앤드 스테이크’(Sex and Steak)는 콩고기 스테이크에 매콤한 마라오일과 부드럽게 달큰한 쌈장아이올리소스가 더해진다. 고추 부각과 양파를 바삭하게 튀긴 양파 크리스피가 곁들여져 식감은 풍부하다. 진한 갈색의 콩고기와 주황색 소스, 붉은 고추 부각, 껍질은 붉고 속은 하얀 래디시, 여러 가지 녹색 허브가 큰 접시를 빼곡히 채운다. 변혜정씨는 “숲속의 섹스 같은 요리예요. 굉장히 다층적인 맛을 경험할 수 있어요. 동시에 은밀해 보이는 섹스/욕망이 별로 은밀하지 않은 일상일 수 있다는 깨달음이 온달까”라고 요리를 설명했다.

안백린 셰프는 거의 모든 요리에 발효한 특제 소스를 5개 이상 섞어 채소 본연의 맛에 감칠맛을 더한다. 버섯과 누룩을 발효해 만든 버섯액젓은 특유의 향과 감칠맛을 내고, 콩이 아닌 당근을 갈아 발효한 당근된장도 신비로운 맛이 난다. 직접 발효한 토종 쥐눈이콩 간장, 식물성 버터 발효소스, 식물성 굴소스 등을 다양하게 배합하고 소금도 5~10가지를 섞어 쓴다.

일반화할 수 없지만, 이런 천년식향의 요리에 대해 고기를 좋아하는 ‘육식파’ 손님들은 긍정적 반응을 내놓는다. “이런 맛이면 비건 할 수 있겠는데요.” “저는 육식파인데 너무 맛있어요.” 비건 손님들은 반문한다. “비건인데 왜 이렇게 짜고 달아요?” “비건인데 왜 스테이크를 따라 해요?”

모녀가 내놓은 답은 뭘까. 안백린 셰프는 “1%의 채식인에게는 채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99%의 비채식인에게는 ‘고기가 아니어도 맛있다’ ‘순식물성 요리도 맛있다’는 경험을 심어주고 싶다. 비건 여부를 떠나 그냥 ‘매혹적인 요리’로 그들을 설득하고 싶다”고 말했다.

‘음료 필수’ 정책도 여기서 비롯했다. ‘채소가 맛없다’ ‘심심하다’는 편견을 깨고 사람들의 눈이 확 뜨이게 하는 강렬한 맛의 요리를 선보이는 천년식향의 달고 짜고 자극적인 요리는 와인을 곁들여야 맛있다. 변혜정씨는 “‘와인 필수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한 셰프의 수작”이란다.

“콩고기 1㎏ 위해 40시간” 정성에도 여전한 가격 저항

안백린 씨는 셰프가 된 이유를 그의 책 <고기가 아니라 생명입니다>에서 쓴 바 있다. 고기 굽는 레스토랑에서 주방 보조로 일할 때 그는 주방이 ‘동물 사체의 전시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체 없는 레스토랑을 만들어나간다는 것이 혁명이고, 도살장 없는 작은 나라를 세우는 일과 같을 수 있다.” 감자튀김, 샐러드 등 사이드 메뉴나, 바지락 없는 바지락파스타, 알 없는 알밥처럼 불완전 메뉴로만 존재하는 비건 메뉴 대신 ‘맛있는 비건 메뉴’를 만드는 일은 “비건 음식의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일”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천년식향이 비건 안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것은 비채식인에게 “고기가 아니어도 이렇게 맛있다”고 말을 걸기 위해서다. 비채식인이 당근 껍질로 퓌레를 만들고 허브 줄기까지 모두 피클을 만드는 등 버리는 식재료가 거의 없어 20ℓ 음식쓰레기 봉지를 채우는 데 두 달 걸리는 천년식향의 노력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연결되지 않을까 싶어서다.

다만 모녀의 ‘지구와 상생하려는 영업전략’은 ‘가성비의 저항’에 부딪혀 3년 내내 아슬아슬한 통장잔고를 찍으며 겨우 버티고만 있다. 사람들이 “고기도 아니고, 풀때기에 가짜 고기를 파는데 너무 비싸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버터, 순식물성 굴소스 등 기본 요리 재료를 일일이 만들어야 하는 비건 식당이 지금보다 가격을 낮추는 것은 요리 노동자의 노동착취를 가져올 뿐이다. 동물성 버터를 사용하는 식당은 버터를 사면 그만이지만, 비건 셰프는 코코넛오일을 비롯한 30여 가지 재료를 넣어서 식물성 버터를 손수 만든다. 한 번에 만들 수 있는 최대량이 2㎏에 불과해, 대량으로 만들어둘 수도 없다. 육류 식당이 스테이크를 만들 때는 고기를 사서 기계 등에 숙성해 구우면 된다. 그러나 ‘섹스 앤드 스테이크’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판 콩고기를 그냥 쓸 수 없다. 특유의 콩취(콩비린내)를 제거하기 위해 24시간 동안 콩고기를 불렸다 물을 짜내는 과정을 다섯번 반복한다. “콩고기 1㎏을 준비하는 데 40시간이 걸려요.” 낮은 가격에 식당을 운영했던 초기에 수많은 부엌 동료가 식당을 떠났다.

사람들은 고급 스테이크 식당에서 스테이크 150g에 10만원이 훌쩍 넘는 것은 용인하지만, 비건 식당에서 5만원 이상의 단품 요리는 용인하지 않는다. 실제 ‘섹스 앤드 스테이크’ 단품 가격은 3만5천원이다.

모녀는 “고기가 채소의 우위에 있다보니 채소 요리를 아무리 고품질로 만들어도 심리적 가격 저항을 낮출 수가 없다”고 씁쓸해했다. “채소 요리 가격의 하향 평준화는 결국 채소를 키우는 농부와 요리 노동자의 노동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라며, “채소 요리가 공짜로 제공되는 ‘반찬’이나 ‘부재료’가 아니라 수많은 매력을 띤 주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변혜정씨와 안백린 셰프가 3년 간 경험을 담은 책 <불편한 레스토랑>.

변혜정씨와 안백린 셰프가 3년 간 경험을 담은 책 <불편한 레스토랑>.

대체육 개발·판매 사업에도 뛰어들어

모녀는 이제 푸드테크 스타트업으로 주식회사 천년식향을 등록했다. 미국 기업 비욘드미트가 만든 콩고기를 사서 불리고 짜느라 애쓰는 대신, 직접 대체육을 개발해 대량생산해서 시판하는 것이 목표다. 안백린 셰프는 “시간이 좀더 오래 걸릴 수 있지만 육류 시장은 비육류 시장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들어진 제품을 통조림화해서 시판하고 싶어요. 지구를 이롭게 하는 ‘맛있는 기술’의 선두주자가 되는 게 꿈이에요.”

채소가 주인공이 되고 동시에 맛있고 첨가물 없는 식물성 고기가 만들어진다면 비건 자영업도 더는 ‘미친 짓’이 아닐 수 있지 않을까.

박수진 자유기고가 surisurij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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