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지금 제정신이에요?”(Are you <i>okay</i>, Ari?)
2023년 4월1일 미국 뉴욕의 한 영화관에서 미개봉 신작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이하 <보>)의 ‘깜짝 상영회’가 열렸다. 179분에 이르는 영화가 끝난 뒤 아리 애스터 감독이 참여하는 행사가 이어졌는데, 이 행사의 ‘깜짝’ 사회를 맡은 배우 에마 스톤이 감독을 향해 처음 건넨 말이다. 영화가 일으킨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한 농담이었다. 참고로 스톤은 영화 <보>를 “소화하기까지 몇 시간이 걸렸다”면서도 “걸작”으로 평가했다. 스톤의 농담에는 생각해볼 만한 점이 있다. 꼭 제정신이어야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누군가는 ‘미친 자들’이 ‘미친 영화’를 만들어주길 내심 바랄지도 모른다는.
애스터 감독은 첫 장편 데뷔작 <유전>(2018)부터 여러모로 ‘범인’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유전>은 집을 주요 공간으로 삼은 하우스 호러 오컬트 영화지만, 공포영화의 관행적 연출 대신 주인공 애니(토니 콜렛)의 정교한 심리묘사로 긴장감을 조성해 신선한 충격을 줬다. ‘여기, 귀신 있소!’ 소리치며 관객을 놀래는 연출 대신, 엄마가 남긴 트라우마가 자기 자식에게 유전될까 두려워하는 애니의 몽유병이 공포감을 자아내는 식이다.
2019년 개봉한 두 번째 장편 <미드소마> 역시 ‘포크 호러’(민속·전통문화를 소재로 삼은 공포영화)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햇볕 쨍한 백주 대낮의 공포물’이 가능하다는 걸 입증해냈다. 영화는 어두운 밤이 사라진 백야 기간에 열리는 스웨덴 축제를 모티브로, 가족을 잃고 가스라이팅하는 애인과의 관계에서 고통받는 대니(플로렌스 퓨)가 다른 가스라이팅 공동체로 빠져드는 과정을 담았다. <미드소마>는 ‘무섭지만 힐링된다’는 아이러니한 평가를 받으며, 아리 애스터를 ‘호러 마이스터(장인)’이자 ‘천재’ ‘괴물’ 감독 반열에 올렸다. <미드소마>부터 평가는 엇갈릴지언정 그만의 독창적 영화 세계가 존재한다는 데는 이견이 적었다.
국내에도 <유전> <미드소마>를 아끼는 관객이 많다는 사실은, 2023년 6월27일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 12관에서 열린 아리 애스터 감독 신작 시사회와 간담회의 첫 객석 질문에서부터 드러났다. “많이 기다렸습니다. 당신(아리 애스터)이 한국을 와보고 싶어 했던 만큼, 저는 때가 되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한 영화평론가) 감독의 첫 내한인 만큼, 에마 스톤이 던진 여유 넘치는 농담 대신, 환대하는 인사부터 등장했다.
이날 기자와 평론가 등을 대상으로 한 간담회는 3시간여의 영화 시사가 끝난 직후부터 1시간 이상 이어졌지만, 참여자 대부분 자리를 떠나지 않고 감독과의 대화에 집중하는 열기로 뜨거웠다. 애스터 감독은 영화와 달리 말이 긴 편은 아니었다. 답변 중간에 종종 머릿속으로 원하는 단어를 고르는 듯 몇 초간의 침묵을 지키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의 말에 ‘확신’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는 “영화가 관객에게 어려운 것 같다. 관객이 이 영화를 어떻게 해석하길 바라는지 궁금하다”는 한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제 영화가 어렵다, 혼란스럽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저는 사실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제 입장에서는 영화가 단순하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이번 영화의 경우, 한 줄로 말씀드리면,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불안과 편집증에 시달리는 주인공 ‘보’(호아킨 피닉스)를 말한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보가 자신에게 ‘과한’ 애정을 쏟는 위압적 엄마 모나(패티 루폰)를 만나러 가는 엿새간의 여정이 큰 줄기로, 보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일생을 담은 ‘오디세이아’ 같은 작품이다. 귀향길 모험담을 그린다는 점에서 <오디세이아>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보는 영웅이 아닌 “루저”(감독의 표현임)다. <보>는 애스터 감독 특유의 잔인한 고어(Gore)를 녹인 초현실적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감독도 유머를 강조했다. 실제로 영화의 초반 45분여는 작정하고 ‘웃기겠다’는 광기가 건물 벽의 낙서, 포스터, 여러 남성의 나체 등으로 과하게 드러나 흥미롭다. 애스터 감독은 간담회 답변에서 유머 감각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이렇게.
―전작들부터 사람의 머리통을 자꾸 터뜨리는데 왜 머리인가요?“재밌잖아요.(웃음) 그런 장면을 넣으면 굉장히 만족스러워요.”
무서운데 웃기고, 웃긴데 무서운 장면이 늘어난 건 전작들과 다른 점이다. 영화는 크게 4개의 장으로 구분되는데, 첫 장은 보가 범죄자들이 넘쳐나는 디스토피아적 도시의 한 낡은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모습, 아버지 기일을 맞아 어머니 집으로 출발하기 전까지의 상황을 보여준다. 보는 정신과 의사(스티븐 헨더슨)를 만나 상담하고 약물 처방을 받는데, 의사는 보의 이야기를 들으며 노트에 “죄책감”이라는 단어를 기록한다.
의사는 보에게 “엄마가 죽기를 바란 적이 있나요?”라고 묻는다. 보가 화들짝 놀라며 부인하자, 의사는 사람 좋은 표정으로 한껏 미소를 지으며 “세상에는 그러고 싶으면서 그러고 싶지 않은 게 있어요. 여기서는 그런 얘길 해도 괜찮아요”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런 장면이 애스터 감독이 말하는 영화의 ‘단순함’을 상징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조차 나중에는 뒤집히고 엎어져서,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 내가 정신과 의사에게 한 말을 엄마가 모두 엿듣고 있었다니! 다시 공포감이 밀려온다.
첫 장 말미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보가 그레이스(에이미 라이언)와 로저(네이선 레인) 부부의 숲속 집에서 ‘강제 돌봄’을 당하다 탈출하는 과정이 두 번째 파트를 이룬다. 보는 아직 엄마의 집으로 전혀 이동하지 못했다. 세 번째 장에서 보는 숲속 유랑극단 공동체를 만나 과거를 곱씹고 ‘가지 못했던/않았던 길’로서 자신의 판타지를 실연한다. 엄마로부터 완전히 ‘독립’해 자신의 핵가족을 꾸리고 ‘제대로 된, 그럴싸한 모험’을 겪는 미래다. 하지만 현실의 보는 오르가슴을 느끼며 사정할 경우 아버지처럼 일찍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 탓에 성욕을 통제해왔다. 결혼은커녕 섹스도 연애도 제대로 못해본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정말 섹스 때문에 죽었을까. 보는 아버지에 대한 어떤 질문도 어머니에게 꺼내어 묻지 못했다. 보는 현실의 자신을 직시한 듯 순순히 엄마 집으로 향해 네 번째 장을 연다.
영화의 마지막 무대는 엄마의 집이자 보의 고향이다. 귀향길이 참 힘들었는데, 귀향 뒤에도 끔찍한 일은 계속된다. 보가 실제로 엄마를 떠난 일이 있었을까 헷갈릴 정도로 보의 정신세계는 엄마와의 관계가 지배적이다. 이쯤 보고 나면, 영화 시작 2시간이 훌쩍 지나 있는 것은 물론, ‘이럴 거면 보는 대체 왜 태어났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유전>이 애니의 시선에서 집과 가족을 비추고, <미드소마>가 대니의 입장에서 호르가 공동체와 만나는 것처럼, <보>는 보의 세계를 관객에게 철저하고 투명하게 전시한다. 전작이 ‘관객의 멱살을 잡고 불쾌함을 직시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처럼, 신작도 불유쾌하게 다가갈 수 있다.
<보>는 감독이 2011년에 만든 7분짜리 단편영화 <보>를 확장한 작품이다. 애스터 감독은 간담회에서 “12년 전 (<보>의) 원고를 처음 썼다. 당시는 영화로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 서랍 속에 넣고 잊었다가 <미드소마>를 마치고 다시 보니 바꿔야 할 부분이 많지만 쓸 만한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1년 정도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며 “나 자신을 잘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게 좋았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보의 세상에 애착이 많다. 지금까지의 영화 중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도 덧붙였다. 그는 늘 작품에 자신을 반영했다고 말했는데(<유전>은 불운한 가족사, <미드소마>는 연인과의 이별이 계기가 됐다), 이번에는 유대인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했다.
애스터 감독은 이번 영화를 두고 “놀라운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사명감이 컸다”고 말했다. 사명감이 ‘지나치게’ 컸을까. <보>가 선사하는 영화적 체험은 충분히 놀랄 만하지만, 그 체험을 누군가에게 열렬히 권할 만큼 가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괴작인지 걸작인지 헷갈린다. <타임>의 영화평론가 스테퍼니 자카렉 은 <보>에 대해 “전작 <유전> <미드소마>보다 더 야심 차고 더 지루하다”며, “티엠아이(TMI·불쾌할 정도로 상세한 타인의 사생활 정보를 의미)의 성찬”이라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애스터 감독이 잘 다루는 주제인 가족관계의 괴로움, 그 속에서 형성된 ‘나 자신’에 대한 지긋지긋한 무력감을 새롭게 경험하고 싶은 이들은 영화관을 찾게 될 것이다. 엄마에게 가는 길은 가깝고도 멀고 이정표가 뚜렷하지 않아, 어느 순간 이 길이 엄마에게 가는 길인지 자아를 찾는 길인지 헷갈리기 쉽다. 영화는 그 혼란스러운 여정을 기괴하게 펼쳐 보일 뿐,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2023년 7월5일 개봉.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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