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성난 사람들>의 주요 장면과 결말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저런 선택을 하다가 정신이 들어보니 여기네.” 마치 인생을 요약해놓은 듯한 이 말은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비프>)에서 대니(스티븐 연)가 한 말이다. 마지막 회에 나온 말이지만, 첫 회 첫 장면에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성난 사람들> 속 인물들은 이런저런 선택을 하며 살지만, 어쩐지 고단하고 불행하기만 하다.
한국계 미국인이자 성실한 도급업자인 대니는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아 괴롭다. 심지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산 숯불 화로를 반품하러 갔다가 마트 직원에게 면박만 당하고 영수증이 없어 반품도 못하고 돌아선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대니는 분노한다.
그때 그의 차를 향해 사나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흰색 고급 에스유브이(SUV). 항의하는 대니에게 운전자는 사과 대신 손가락 욕을 날리고 떠나버린다. 그 운전자는 중국계 미국인 에이미(앨리 웡). 에이미는 ‘고요하우스’라는 플랜테리어(식물+인테리어) 매장을 운영하는 여성 사업가인데, 2년 동안 공들인 일에 진척이 없자 잔뜩 화난 상태다. 그런 에이미 앞에 하필 대니의 차가 걸리적거린 것이다.
누군가에게 성낼 이유가 충분했던 둘은 그렇게 ‘로드 레이지’(Road Rage·다른 운전자를 방해하거나 공격하는 행위) 소동을 계기로 그간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분노 에너지를 서로를 향해 터뜨린다.
처음에는 사소하고 하찮은 복수였다. 대니는 에이미의 차 번호를 검색해 집주소를 알아내고 그 집에 방문해 수리할 것을 살피는 척하다가 욕실 바닥에 소변을 흩뿌린 채 도망친다. 에이미는 그런 대니를 추적하다가 대니가 운영하는 수리업체 웹사이트에 별점 테러를 한다. 이 사소하고 하찮은 복수가 이들의 삶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자기 꼬리를 먹는 뱀”처럼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드라마 구조만큼, 이 드라마를 본 이들의 반응도 다양하고 흥미로웠다. 특히 유학이나 이민 등의 이유로 미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거나 현재 거주하는 한국인들이 가장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드라마는 미국 사회를 경험한 아시아인이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실제감 높은 상황이 곳곳에 배치돼, 마치 손톱으로 칠판 긁는 소리처럼 정서를 자극한다.
대니의 열심은 아시아인을 향한 은근한 경멸에 번번이 좌절되고, 에이미가 이룬 성취는 백인에게 가볍게 무시되곤 한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 사회에서 자란 ‘미국인’이어도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경계가 생길 때의 거리감, 그럼에도 그 세계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그들이 요구하는 태도를 유지하려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고단함, 그 과정에서 생긴 비애와 분노를 표현할 적절한 언어와 기회가 정당하게 주어지지 않을 때의 무력감 등 드라마는 이들이 처한 현실을 사실주의적 재현과 뼈 있는 유머를 통해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게다가 미국이지만 너무나 한국적인 대니 가족의 대화나 한인 교회 풍경은 이 드라마가 다큐멘터리인가 의심될 정도로 사실적이다.
물론 드라마 속 상황이 미국 내 아시아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아시아계 미국인’(Asian American)을 향한 스테레오타입(고정관념)은 서구 백인 사회가 만든 환상 혹은 억압에 가깝지만, 부모 세대(혹은 그 이전)에서 대물림됐거나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것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후반부로 갈수록 이 점에 주목하며 대니와 에이미가 처한 상황 너머에 있는 좌절과 분노의 근원을 탐구한다.
대니는 틈만 나면 동생 폴(영 마지노)에게 “김치찌개 끓여놓고 집에서 기다리는 참한 한국인 아가씨를 만나야 한다”고 충고하는 등 지극히 한국 가부장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다. 또한 “항상 가족을 위해 일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폴의 평가처럼, 사업에 실패한 부모를 대신해 동생을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고, 가족이 다시 모여 살 집을 마련하려 애쓰는 등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케이(K)-장남’에 가까운 인물이다. 물론 대니가 전적으로 선량한 희생자는 아니다. 폴이 대학 진학에 실패해 곁에서 자신처럼 살기를 바라며 폴의 대학 입시 지원서를 몰래 버리고, ‘수리 전문가’이지만 배선 공사를 잘못해 집에 불을 내고도 에이미를 방화범으로 지목할 정도로 복합적 인물이다. 그의 가부장성과 무능함과 비겁함은 어디서 비롯했을까?
에이미는 부모가 원하지 않았는데 태어났다는 생각 때문에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믿지 않는다. 안정감을 가지기 위해 선택한 남편과 절대적 사랑을 교환하리라 믿었던 딸에게서도 ‘조건 없는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게다가 아시아 여성인 자신을 향한 은근한 경멸과 차별, 사업상의 이유로 가면처럼 장착해야 하는 가식과 위선, 재능 없는 예술가 남편 조지(조지프 리)와 딸을 부양하느라 쉬지도 못하고 일해야 하는 실질적 가장으로서의 고단함 등 에이미 주변은 조건과 노력이 필요한 것투성이다. 일본인 예술가 가정에서 자란 남편은 명상으로 감정을 다스리고 ‘감사 일기’를 쓰라고 권면할 뿐 에이미의 감정에는 관심이 없다.
“몇 세대에 걸친 잘못된 결정이 축적된 기분”이라던 말처럼 대니의 부모와 에이미의 부모, 즉 부모 세대는 사는 게 바빠 자식을 온전하게 사랑하지도 못하고, 사랑받는 법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한 채 트라우마를 자식에게 배설하며 대물림했다. 그러고는 “문제가 뭐든 그냥 묻어두라”고 할 뿐이다. 그러니까 대니와 에이미의 분노는 우연한 기회에 폭발했지만, 사실 그들의 인생을 통해 축적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대니와 에이미의 사정은 특정 사회의 일부이지만은 않다. 에이미의 남편인 조지는 예술가인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안고 사는 인물로, 아버지가 자신에 대한 “실망을 품고 눈감으셨을까” 생각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예술과 명상으로 포장하며 산다(조지의 작품이 화려한 장식에 둘러싸인 똥 모양인 게 인상적이다). 대니가 한인교회에서 만난 에드윈(저스틴 민)은 자기 아내가 한때 대니와 교제했다는 이유로 질투심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대니를 교회 모임에서 배제하려 한다. 에이미가 사업차 만난 여성 자산가 조던(마리아 벨로)은 겉으로는 인간적 관계와 정신적 가치를 강조하지만, 계급의식이 뚜렷한 속물적이고 위선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미끼로 에이미를 ‘가스라이팅’한다. 조던 남동생의 아내이자 에이미의 친구인 나오미(애슐리 박)는 겉으로 에이미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 같지만, 그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끼자 분노하며 에이미를 위험에 빠뜨린다.
<성난 사람들>이 생생하게 묘사한 인물들의 어두운 내면이 그리 낯설지 않다. 내 내면을 여러 갈래로 조각낼 수 있다면 대니와 에이미, 조지와 조던, 나오미로 적절하게 나뉘지 않을까? 드라마 속 사건과 같은 상황에 휘말리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 내면의 사정도 꽤 복잡하고 시끄럽다. 그 복잡하고 어두운 내면은 성난 얼굴을 한 채 ‘로드 레이지’처럼 누군가를 위험에 빠뜨릴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성난 사람들>은 대니와 에이미,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 너머,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긴 터널 같은 내면의 어둠과 성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드라마는 10회에 이르러서야 터널의 끝을 희미하게 보여준다. 사소하고 하찮은 복수가 큰 사건으로 번지고, 서로를 향해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던 대니와 에이미는 죽을 위기에 처한다. 원수였던 이들은 살기 위해서라도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길고 험난한 길을 돌고 돌아 서로의 진심에 닿게 된 두 사람. 무려 ‘식물 전문가’를 자처한 에이미가 고른 열매를 먹고 환각 상태에 빠져 그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던 자신의 어두운 내면과 잘못을 고백하다가 마침내 이렇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Who am I?)
이 질문은 ‘나도 나를 모르겠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너는 나이고 나는 너다’라는 깨달음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대니와 에이미는 ‘고통에 울부짖’(1회 제목 일부)고 있었다는 면에서 닮았다. 역설적이게도 둘은 서로를 향해 분노하며 복수할 때 ‘살아 있다는 황홀함’(2회 제목), 즉 살아야 할 의미를 찾고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다. 자신들이 힘겹게 쌓은 것이 붕괴하고 나서야 둘은 서로의 내면이 울음과 어둠으로 가득하다는 점을 깨닫고, 그런 어둠을 발견한 뒤에야 비로소 ‘나’의 어둠에 ‘너’의 어둠을 포갤 수 있게 된다.
조지가 쏜 총에 맞고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대니의 몸을 에이미가 감싸고, 그런 에이미를 대니의 손이 감싸는 마지막 순간, 고단하고 외로웠던 둘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듯 형형색색의 빛이 그들을 비췄다. 그때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저런 선택을 하다가 정신이 들어보니 여기네”라던 대니의 한숨 같은 말이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라면 그들의 인생이 더는 외롭고 고단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안도했고 깊이 위로받았다.
<성난 사람들>의 마지막 회 제목은 ‘빛의 형상’이다.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의 말 “사람은 빛의 형상을 상상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의식화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습니다. 자신의 어둠을 아는 것이 다른 사람의 어둠을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에서 차용했다고 한다. 이 문장을 영상화한 것 같은 마지막 회를 위해 드라마는 그토록 벅차게 달려왔나보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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