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을 관람한 뒤 한 달 동안 밤길을 달렸다. 운동은 아니었다. 귀갓길에 나무 덤불이 무성한 구간이 있었다. 영화에서 살인마가 덤불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여성을 납치하는 장면이 그 구간에 겹쳐 보였다. 비합리적인 상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몸이 감각하는 공포는 실재했다. 영화가 바탕으로 삼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은 개봉 당시까지만 해도 진범을 찾지 못한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봉준호 감독은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쓰며 다른 연쇄살인 사건, 미제 사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보스턴 연쇄살인 사건’도 접했다고 한다. 1962년부터 1965년까지 보스턴 일대 여성 13명이 같은 방법으로 잔혹하게 죽임을 당했다. 피해자들의 나이는 19~85살이었고, 인종도 다양했다. 유력한 용의자 앨버트 데살보가 붙잡혔지만,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해 수십 년이 지나도록 미제 상태다.
희대의 사건인 만큼 일찌감치 영화화됐다. 1968년 개봉한 영화 <보스턴 교살자>는 리처드 플라이셔 감독의 감각적 연출과 당대 ‘청춘스타’ 토니 커티스의 열연으로 주목받았다.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자신의 대표작 <큐어>(1997)에 영향을 준 작품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2023년 3월17일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디즈니플러스가 공개한 영화 <보스턴 교살자>도 실화인 보스턴 사건을 바탕으로 한 범죄 스릴러물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제작했고 신예 맷 러스킨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2023년판 <보스턴 교살자>는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범죄 스릴러물에서 예상 가능한, 남성 형사와 남성 용의자 간의 쫓고 쫓기는 남성 주도 서사를 비켜 간다. 지역 신문 <레코드 아메리칸>의 여성 기자 로레타 매클로플린(키라 나이틀리)이 극을 이끄는 주인공이다.
로레타는 보스턴 사건을 최초로 보도한 실존 인물이다. 영화에서 로레타의 주요 조력자로 등장하는 또 다른 여성 기자 진 콜(캐리 쿤)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현실에서도 보스턴 사건 후속 취재와 보도를 함께 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범죄영화의 껍데기를 쓰고서 1980년대 한국의 군부독재 폭압과 실정이 어떻게 국가가 시민의 목숨을 지키는 기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배경으로 작동하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냈다. <보스턴 교살자>는 성차별이 한층 공고했던 1960년대 미국 사회의 백인 남성 중심성을 꼬집는다. 세 자녀를 둔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저널리스트인 로레타는 직장(언론사)과 취재처(경찰서)는 물론 가정에서 겹겹이 둘러싸인 성차별과 맞서 싸워야 한다. 백인 남성이 지배적인 뉴스룸에서 여성 기자들은 대부분 생활부(라이프스타일 데스크)에 배치됐다. 영화는 사건 취재를 원하는 로레타가 생활부에서 ‘신상 토스터’ 사용기를 써야 하는 상황부터 보여준다.
보스턴 사건을 최초로 알린 ‘특종’ 기사도 투쟁의 산물이었다. 로레타는 여러 언론 보도를 취합해 2주 동안 노년 여성 셋이 목이 졸려 숨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상사에게 사건 취재를 허락해달라고 요구한다. 상사는 말한다. “관심 없어. 별볼일 없는 사람들(nobodies)이잖아.” 실제 로레타는 보스턴 사건 최초 보도 당시 한 편집자로부터 ‘노바디’라는 말을 들었다고 1992년 회고글에서 밝혔다. 영화보다 한 사람 많은 네 번째 희생자가 나온 시점이었다. 로레타는 남성 상사와 달리 바로 그 점에서 취재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대체 누가 왜 별볼일 없는 여성 넷을 죽였나? 우리 같은 익명의 자매들은 그 지점이 궁금했다.”(1992년 로레타가 <보스턴 글로브>에 쓴 글 중에서)
로레타의 취재 결과, 범행 수법이 교살로 동일한 것은 물론 살해한 여성의 목에 스타킹이나 스카프로 나비 모양 매듭을 만드는 시그니처까지 확인됐다. 기사는 신문 1면 톱기사로 보도되고 로레타보다 사건 보도 경험이 많은 진 콜이 후속 취재에 합류한다.
신문사 경영진은 로레타와 진의 여성성을 대놓고 상품화한다. 이례적으로 취재기자의 얼굴 사진을 큼지막하게 노출하는 식이다. 영화에서 로레타와 진은 신문 독자에게 ‘아가씨들’(Girls)로 소개된다. 실제로도 그랬다. 두 사람은 당시 30대 기혼자였지만, 신문에는 ‘기자 아가씨들(Girl Reporters)이 교살자를 분석하다’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한다.
영화는 언론사의 구멍은 물론 사법체계의 빈틈도 놓치지 않고 후벼판다. 사건의 희생자가 10명까지 늘었는데도, 경찰은 용의자를 검거하지 못한다. 로레타와 진은 뉴욕 경찰의 제보를 받아 보스턴 경찰의 무능함과 무심함을 고발하는 기사를 쓴다. 보스턴 경찰은 “그 여자들이 경찰 일을 뭘 알겠냐”며 로레타와 진의 보도를 폄하한다. 하지만 경찰이 조사를 중간에 포기한 용의자 앨버트 데살보의 알리바이를 깨는 증거를 찾아내고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것 역시 로레타와 진이 이룬 성과다.
여성 폭행 혐의로 정신병원에 수감 중이던 앨버트 데살보는 13건의 살인 사건을 모두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한다. 데살보가 범인이라는 더 직접적인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정부와 경찰은 서둘러 사건을 마무리하려 한다. 언론도 ‘교살자의 공포는 끝났다’며 데살보의 자백을 대서특필한다. 하지만 로레타는 데살보가 형편에 맞지 않는 비싼 변호사를 선임하고, 그 변호사가 정부와 사법 거래하며 언론플레이에 나선 점을 이상하게 여긴다.
데살보의 자백 이후에도 여성들은 죽었다. 보스턴 지역 바깥에서도 보스턴 사건과 똑같은 모습을 한 살인 사건이 이어지자, 로레타는 데살보 자백의 진실을 파헤친다. 마침내 로레타는 데살보와 같은 병동에 수감돼 있을 때 그의 자백을 도와서 포상금을 받기로 약속 받았다는 범죄자 조지 나사르를 찾아낸다. 그와 로레타의 대화는 이제 평범한 사회구성원들을 비추며 영화를 보는 관객까지 영화에 참여시킨다.
“사람들은 범인이 데살보라고 믿고 싶었고, 데살보라고 믿어야 했어요. 다른 결론은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다른 결론이 뭔데요?” “(감옥 바깥에) 수많은 앨버트 데살보가 있고 안전한 세상은 착각에 불과하다는 거요. 남자가 여자를 죽이는 건 데살보가 시작한 게 아니에요. 물론 데살보와 함께 끝나지도 않고요.”
로레타는 데살보가 진실을 회피하고 싶은 모두에게 “편리한 탈출구”였다는 사실을 간파한다. 보스턴 교살자가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라는 밀도 있는 분석을 담은 기사를 써서 다시 한번 사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보스턴 사건을 다룬 다른 영화가 앨버트 데살보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끝난다면, 2023년판 영화는 한 사람의 흉악범 대신 사회 전체를 돌아보게 한다. 실제 범죄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을 영화로 소비하는 관객을 성찰로 이끈다. 짜릿한 반전이나 ‘사이다’ 결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모든 프레임이 험한 가시밭길을 헤쳐가는 우직한 걸음걸음일 뿐이다. 로레타는 자주 넘어지고 다치고 실패하지만, 계속해서 나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의 곁에서 함께 걷는 동료 진과의 연대와 우정이 빛나는 순간이 영화의 숨구멍이다.
로레타 역을 연기한 배우 키라 나이틀리는 <하퍼스 바자> 인터뷰에서 영화에 대해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일상적인 사무실 상황부터 가장 극단적 형태인 페미사이드(femicide)에 이르기까지, 이 영화는 모든 스펙트럼을 아우르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말했다. 페미사이드는 여성을 일컫는 라틴어 ‘femina’와 살인을 뜻하는 영어 ‘homicide’를 더한 말로, 여성이 겪는 가장 극단적인 폭력을 뜻한다. 영화 <보스턴 교살자>는 보스턴 연쇄살인 사건에서 덜 주목받은 여성 기자들을 역사에 다시 기입하면서 사건을 젠더렌즈(Gender Lens)로 입체화했다.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사회에서 벌어지기 쉽고 대응하기 어려운 여성 대상 범죄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영화는 모두 네 번의 범죄현장을 담았지만, 잔혹한 범행 수법을 직접적으로 재현한 장면은 거의 없다. 공격과 저항의 대부분을 소리로 전하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히 현장의 생생함이 느껴진다. 카메라는 여성 피해자의 몸을 천천히 훑어내리는 데 시간을 들이는 대신, 피해자의 집에 놓인 신선한 우유 같은 일상적 소품에 주목한다. 신문에 실린 범죄 기사를 읽는 평범한 여성 독자의 얼굴을 비춘다.
“여자가 얼마나 죽어야 기사가 되는데요?” 영화에서 로레타는 자신이 쓰려는 기사 ‘여성 시민을 못 지키는 도시’를 못 쓰게 하는 국장에게 이렇게 항의한다.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여성이 죽거나 다치는 범죄 보도가 쏟아진다. 다수는 원인과 대안을 깊이 다루는 심층 기사가 아닌 일회성 단신이다. 많은 언론이 ‘조회수가 어느 정도 나올 것 같은 수준’에서만 여성 대상 범죄를 다룬다. 왜 그럴까. 1960년대 미국 사회를 다룬 영화지만, 오늘날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담았다. 보스턴 교살자들은 여전히 잡히지 않았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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