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의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한 지휘자 리디아 타르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 타르는 감독이 블란쳇을 염두에 두고 창조한 가상의 존재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첫 여성 상임 ‘마에스트로’, 독보적인 예술가, 위선적인 야망의 화신, 레즈비언, 젊은 여성 음악가 육성 프로젝트의 설립자,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성추문 속 가해자.
이 영화의 평은 대체로 두 가지로 좁혀진다. 하나는 이처럼 복합적인 인물을 강렬하게 구현해낸 케이트 블란쳇의 자질에 대한 상찬이다. 그는 이 영화로 이미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으며 다가오는 아카데미 영화제의 같은 부문 유력 후보자다. 다른 하나는 일종의 당혹감이다. 그간 매스컴에 오르내리던 폭력적인 남성 권력자와 다를 바 없는 ‘여성’ 음악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예술가의 사적인 삶 혹은 도덕성과 창작물을 필연적 관계로 볼 것인가, 분리된 영역으로 대할 것인가.
영화 안에서도 이 물음은 처음에는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두 견해로, 나중에는 타르가 연루된 사건의 맥락으로 제기된다. 강의 장면에서 자신을 ‘팬젠더’(모든 성별 정체성을 가진 젠더)라고 밝힌 유색인 학생은 바흐의 여성 혐오적인 삶에 동의할 수 없으므로 그의 음악 또한 거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타르는 음악의 무결한 아름다움을 강조하며 학생의 편협함을 집요하게 따져 묻는데, 그 공격적 언사가 그를 결국 교실 바깥으로 내몬다. 그러나 영화 후반, 타르의 완고한 논리는 사생활이 촉발한 급격한 몰락에서 정작 그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한다.
이 영화는 학생이나 타르처럼 하나의 입장에 무게를 싣지 않는다. 지난 몇 년간 문화예술계를 강타한 화두로 한 인물의 초상을 구현하고 운명을 가르면서도 판단이나 대답은 유보하는 길을 택한다. 관객이 ‘당혹감’에도 결국 이 세계에 호응한다면, 중립적 태도를 내세우며 논쟁적 인간형을 질문에 부치는 영화의 방식, 이에 감탄할 만한 힘을 실어준 배우의 연기력에 수긍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감상에 동화되지 않는 소수의 관객 중 하나다. 이 영화가 뛰어난 여성 음악인을 추악한 남성 권력자들과 같은 선상에 두었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조심스러운 사안이긴 해도, 예술가와 작품의 관계가 앞선 두 사람의 주장처럼 언제나 하나의 기준으로 정리된 확고한 신념의 대상일 수 있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타르>가 불러낸 해묵은 쟁점이나 그것들이 환기하는 현실 속 사건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나는 이 영화가 불편하다. 정치적으로 더없이 첨예한 인물을 다루는 <타르>의 관점은 세간의 평과 달리 충분히 정치적이지 않다.
영화가 시작한 뒤 40여 분에 이를 때까지 화면을 채우는 건 다름 아닌 ‘말’이다. 타르의 천재성과 업적, 예술론과 가치관에 대한 말이 인터뷰어의 입으로, 온라인 글귀로, 무엇보다 타르 본인 목소리로 다소 장황하게 설명된다. 화려한 수식어와 자신만만한 언어는 지휘자 타르의 명성에 집중한다. 영화가 긴 시간을 할애한 초반 장면들에서 타르는 외부 시선에 비친 고차원적이고 완벽한 예술가의 형상이다. 그가 망설임 없이 격정적으로 내뱉는 말에는 그 형상을 완성하려는 의지 또한 배어 있다.
이후 장면들은 앞선 말의 정교하고 우아한 논리가 무너지는 과정을 주시한다. 영화는 이제 그 논리에 부합하지 않거나 그것으로 포장되지 않는 한 인간의 초라하고도 사악한 충동, 욕망, 야심의 표정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타인을 모함하고 착취하며 지위를 이용해 젊은 여성에게 추파를 던지는 권력자. 그는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익숙한 추락하는 남성 권력자의 전형적인 행태를 답습한다. 이 영화가 일견 반여성적이라는 지적도, <타르>의 중심이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 “권력의 부패한 본질”을 겨냥한다는 케이트 블란쳇의 해명도 모두 이에 기인할 것이다. 전자의 비판은 단선적이고 후자의 항변은 모순적이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육체성과 만나지 않는 권력 일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르>의 문제적 핵심은 따로 있다. 이 영화는 권력자의 몰락 과정을 그가 놓인 특수한 조건(백인, 레즈비언, 상류층, 엘리트, 기성세대) 위에서가 아니라, 그의 불안정하고 비틀린 내면에 천착해서 재현한다. 타르는 원시림 안에서 잠든 꿈을 꾸거나 더러는 기이한 악몽에 시달리고 자주 이상한 소리에 쫓긴다. 이 장면들은 대체로 몽환적이고 초현실적이다. 영화는 타르를 그가 저지른 현실의 오점과 충돌하게 하는 대신 내부의 어둠 속으로 점차 침잠시킨다. 후반부,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그가 무대에 난입해 벌이는 무차별 폭력은 나르시시즘의 극단적 표출이다. 여기서 타르는 사회구조적인 맥락을 잃은 광인의 이미지로 대상화된다.
인종적·계급적 기득권으로서 타르가 누리는 물적 토대는 종종 그의 심리적 트라우마를 현시하는 탈현실화된 무대가 된다. 예술가이자 권력자인 한 인간의 예외적인 성질에 심취해 영화가 오용한 대목이 그 예다. 타르의 고요한 작업실 문을 시끄럽게 두드린 초라한 행색의 여인은 두 번째 등장에서 타르를 자기 집으로 끌고 간다. 더러운 거실에 거의 뼈만 남은 노인이 벌거벗은 채 쓰러져 있다. 이웃의 집은 타르의 고급스러운 작업실과 한 건물에 속한 공간이라고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예술적 영감이 탄생하는 곳과 죽어가는 사람이 방치된 곳의 시각적 대비, 둘의 계급적 격차는 충격적이다. 타르가 작업실에서 듣던 출처 없는 벨소리가 실은 환청이 아니라, 이 집 내부의 알람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상류층의 얼룩 하나 없는 매끄러운 시공간에 이토록 누추한 일상의 장면을 갑작스레 틈입시킨 의도는 무엇일까. 삶의 조건에서 동떨어진 타르의 폐쇄된 예술 세계를 비판적으로 응시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이 대목은 타르가 꿈에서 보고 소스라치던 형체 잃은 얼굴처럼 타르의 영혼을 섬뜩하게 건드리는 미학적으로 이질적인 광경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웃의 난데없는 출현은 타자의 서사가 되어 타르의 현실에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다. 집에 돌아온 타르는 마치 온몸에 벌레가 묻은 듯 요란스레 옷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싱크대 물을 맨몸에 끼얹는다.
타르가 첼리스트 올가의 거처에서 겪은 일 또한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처리된다. 타르는 올가가 차에 인형을 두고 내리자 그를 쫓아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내부는 밖에서 볼 때보다 더 처참한 폐허이고 올가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타르는 뭔가에 홀린 듯 어둡고 축축한 지하를 헤매던 중 짐승의 으르렁대는 소리를 듣고 겁에 질려 도망치다가 바닥에 세게 넘어진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타르는 만신창이가 된 얼굴로 파트너의 보살핌을 받는데, 사고 순간은 이후에도 자세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공격받았다고 말할 뿐이다.
사람이 살기 불가능해 보이는 저 음습한 건물의 정체는 무엇일까. 올가의 노랫소리는 분명 들렸는데, 그는 왜 타르의 부름에 답하지 않았을까. 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타르를 덮친 건 정말 짐승이었을까. 젊은 음악가의 가난한 삶의 지대는 어느새 타르의 죄책감, 두려움, 매혹을 얼마간 신비롭게 서사화하는 심연의 풍경으로 기능한다. 이웃의 집처럼 이 건물 역시 실재하는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타르의 심리를 대리하는 악몽처럼 재현된다.
그렇다면 타르의 내적 행로 끝에 영화가 도달한 이국의 시공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서구에서 추방된 백인 여성 지휘자가 동남아시아 지역 어느 오케스트라의 환대를 받는다는 설정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서구의 도덕관념이 작동하지 않는 현실 너머의 어딘가라는 말인가. 무엇보다 결말부에 등장하는 한 장면이 개운하지 않다. 타르가 찾아간 마사지숍의 커다란 통창 안에는 젊은 여성들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다. 그중 하나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타르를 뚫어지게 응시하는데, 그 시선에 타르는 얼어붙고, 이내 건물 바깥으로 뛰쳐나와 구토한다.
감독이 설계한 이 대목의 방점은 바로 타르 자신에게로 향한 토악질, 수치심을 모르던 예술가가 비로소 마주한 자기혐오의 민낯일 것이다. 그러나 그 토악질의 순간이 무얼 표상하든 상류층 백인 엘리트 여성의 내적 층위에 이르기 위해 영화가 어린 아시아 여성들의 선정적 이미지 조각을 동원하고 전시한 방식은 의심스럽다. 결국 이 지점에 <타르>의 무의식이 있다고 느낀다.
남다은 영화평론가·<필로>(FILO)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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