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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뜨면 왜? 회장님 손자, 황제의 딸, 금수저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 회귀 설정에 나타난 능력주의의 함정
등록 2022-12-11 13:22 수정 2022-12-14 01:50
JTBC 제공

JTBC 제공

“눈떠보니 내가 이 제국 최고 권력자의 유일무이 외동딸이라고?!”

요즘 유행하는 웹소설 설정을 본떠 내 인생을 상상해봤다. 이왕 상상한 김에 다른 드라마나 웹소설의 제목들(<파산 후 코인 대박> <톱스타와 결혼했습니다> 등등)을 적용해봤다. 어느 날 일어나보니 내가 코인 부자가 됐다. 파산 뒤 코인 대박이라니! 내 인생의 황금기로 회귀한 것이다. 성공은 또 성공을 불러와 마침내 톱스타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그런데 그 톱스타가 알고 보니 재벌 상속자라고? 그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진다.

대세 콘텐츠 ‘회빙환’

현실에서는 이런 인생이 불가능하지만 웹소설이나 웹툰, 그리고 드라마라면 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웹소설이나 웹툰, 그리고 드라마 속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능력자에게 빙의해 누군가에게 복수하거나,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고 부러워하는 권력자나 재력가가 되는 걸 보며 팍팍하고 지루한 일상을 견딘다.

그래서일까? 최근 몇 년 동안 이른바 ‘회빙환’(회귀·빙의·환생) 서사 방식을 가진 대중문화 콘텐츠가 대세다. 웹소설과 웹툰뿐 아니라 2022년만 해도 <어게인 마이 라이프>(SBS), <환혼>(tvN), <금수저>(MBC) 등이 방영될 정도로 드라마에서도 익숙한 코드가 됐다. 동명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JTBC)은 회빙환 중 ‘회귀물’에 속하는 드라마다. 회귀물이란 현실에서 실패한 주인공이 억울하게 죽어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의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 새로운 몸으로 ‘인생 2회차’를 살며 이미 가지고 있는 정보를 활용해 성공과 복수를 이룬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서사구조다.

윤현우(송중기)는 고졸 출신으로 국내 1위의 대기업 순양가(家)의 리스크를 관리하는 기획조정본부 산하 미래자산관리팀장까지 올라선 인물이다. 말이 좋아 팀장이지 그가 하는 일은 “회장 일가의 온갖 지저분한 일을 조용히 처리하는” 머슴에 가깝다. 그러던 중 오너 일가가 국외에 은닉한 비자금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국했다가 오너 일가 중 누군가의 지시로 죽임을 당한다. 죽은 줄 알았던 윤현우는 자신이 순양그룹의 ‘4-2’(회장 넷째 아들의 둘째 아들을 지칭하는 순양 직원들이 쓰는 용어)의 몸으로 살게 됐다는 걸 자각한 뒤 ‘재벌집 막내손자’ 진도준으로 살며 자신을 머슴처럼 부리다 죽인 순양그룹을 상대로 복수를 감행한다.

윤현우가 살게 된 ‘인생 2회차’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한 번쯤 가져봤을 욕망을 자극한다.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도 재벌집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옹기나 짓던 별 볼일 없는 땅”으로 취급되던 분당지구 토지 5만 평을 증여받아 부를 획득하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대비해 달러를 확보하고 막대한 환차익을 얻으며, 아직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아마존이나 애플의 주식을 사들여 재산을 증식하는 등 경제적 성공을 하고 싶다는 욕망 말이다.

재벌의 ‘몸’과 서민의 ‘머리와 가슴’

우리가 이 드라마에 몰입하는 이유는 물론 재미있기 때문이지만 특권, 계급, 능력주의 등 뜨거운 사회 주제와 연결되기 때문 아닐까? 이 드라마에서 특히 능력이 중요한 이유는 성공이든 복수든 그 욕망을 실현하려면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도준의 복수가 가능한 이유는 그가 전생의 기억과 능력을 가진 채 회귀했기 때문이지만, 재벌 3세라는 사회적 지위를 획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능력은 비록 재벌가의 핏줄이지만 하필 ‘장자 승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집안의 혼외 자식인 넷째 아들의 둘째로 회귀했기에 미완의 능력이다. 진도준의 복수는 순양그룹 후계자로서의 능력을 입증하거나, 막대한 재력과 권력을 소유한 자산가가 되어 순양그룹을 사들일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즉, 회귀로 정보력과 능력을 가진 재벌 3세가 됐지만 자기계발로 자기 능력을 갱신해야 한다는 면에서 진도준의 위치는 불완전하고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진도준이 재벌의 ‘몸’과 고졸 출신 대기업 머슴으로 살아온 서민의 ‘머리와 가슴’을 가진 양면성을 지녔다는 면도 인상적이다. 진도준은 전생의 기억이 있기에 태어날 때부터 재벌인 사람들과 다를 수밖에 없다. 진도준은 “머슴을 키워가, 등 따습고 배부르게 만들면 와 안 되는 줄 아나? 지가 주인인 줄 안다. 정리해고 별거 아니다. 누가 주인인지 똑똑히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할아버지 진양철(이성민) 회장과 대립각을 세우면서까지 고용승계를 약속하며 아진자동차를 인수해 윤현우 아버지의 해고를 막는 등 여느 재벌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윤현우 어머니의 죽음이 순양그룹과 연관됐음을 알게 되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자식에게 부를 세습하기 위해 개미투자자들을 약탈하는 대기업의 행태에 진도준은 절망하며 분노한다.

진도준의 양면성은 특권과 능력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법조 명문가 집안에서 자라 서울대 법대에 진학한 동급생 서민영(신현빈)을 향한 진도준의 일갈이 대표적이다. “그 모든 게 태어날 때부터 너에게 주어진 특권이라는 생각 정말 단 한 번도 안 해본 거야?” 이런 진도준의 문제의식은 그의 사업 파트너 오세현(박혁권)과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람들 참 이상해요. 북쪽에서 김씨 부자가 권력을 세습하는 건 그렇게들 못 참아 하면서 남쪽에서 재벌 3세가 경영권을 세습하는 건 왜 다들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요? 어차피 자격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요?” 이런 진도준의 말은 대물림된 권력과 재력이 능력의 토대가 되어 불공정한 사회를 만든다는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진도준의 문제의식은 여기까지다. 계급과 부를 대물림하는 특권에 대한 반감, 재벌의 탐욕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자신이 가진 능력 또한 전생의 경험과 지식, 재벌 3세라는 계급적 토대 위에서 발휘될 수밖에 없는 현실과 충돌한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장자 승계 관습을 깨고 순양그룹을 차지해 복수를 완성할 수 있기에 그의 성공 방식은 그가 비판하는 재벌의 방식과 신자유주의 체제의 자기계발 담론과도 닮았다. 그렇기에 진도준은 체제를 바꾸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부동산개발과 주식투자로 부를 획득하는 자본가의 성공 방식을 답습해 그들 위에 올라서려 할 뿐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을 포함해 최근 재벌물에 등장하는 재벌은 진양철처럼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노력해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로 그려지는 일이 많다. JTBC 제공

<재벌집 막내아들>을 포함해 최근 재벌물에 등장하는 재벌은 진양철처럼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노력해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로 그려지는 일이 많다. JTBC 제공

문제의식과 선망의 공존

이 드라마는 ‘회귀물’이지만 ‘재벌물’로도 의미가 있다. 재벌물이란 재벌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서사 방식이다. 과거의 재벌물과 <재벌집 막내아들>은 어떻게 다를까? 다른 재벌물 속 재벌들은 로맨스드라마 주인공이라든가, 정치권력과 결탁한 탐욕스러운 자본가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재벌집 막내아들>을 포함해 최근 재벌물에 등장하는 재벌은 진양철처럼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노력해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로 그려지는 일이 많다. 그들은 뛰어난 기업 운영 능력을 바탕으로 강한 책임감을 갖고 기업과 가족을 이끈다. 비판적 대상으로서 재벌이 아닌, 성공 모델 혹은 선망의 대상으로서 재벌이 부각된다. 진양철이 딱 그런 재벌이다. 그는 자본가로서 냉철하고 권위주의적인 얼굴을 가졌지만, 손자의 도발을 지켜보며 기회를 주거나 신념처럼 지킨 장자 승계 원칙을 깨는 유연한 면도 가졌다.

전생의 윤현우는 ‘순양그룹 창업주 진양철 회장’의 자서전을 탐독하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진양철의 손자 진도준으로 살게 됐을 때는 진양철에게서 기업가 정신과 전략을 배우며 그와 유대관계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진도준의 복수를 응원하면서도 그와 대립하는 진양철을 긍정적으로 여기게 된다. 재벌을 문제적으로 보는 마음과 재벌이 이룬 성취를 긍정하며 재벌 세계를 선망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드라마의 원작인 웹소설 <재벌집 막내아들>을 지은 산경 작가는 최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재벌물에 열광하는 이유를 이렇게 진단했다. “사람뿐 아니라 영장류 자체가 계급사회다. 본능적으로 모든 걸 급을 나눠 구분한다. 비행기도 퍼스트·비즈니스·이코노미로 나뉘지 않나. 그 계급을 없애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지만 올라타고 싶어 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사냥과 수렵 역시 이러한 본능을 충족시켜주는 활동이고. 악역일 수도 있는 진양철 캐릭터가 사랑받는 걸 보면서 사람들은 역시 정점에 있는 지배자를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즉, 계급을 나눠 그 위에 올라가 지배자가 되고 싶은(혹은 그런 지배자를 선망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그래서 재벌물이 인기를 끈다는 것이다. 성공 욕망과 지배 욕구가 신자유주의체제의 산물이 아닌, 자연법칙이라고 여긴다면 진도준의 미래는 결국 진양철이고, 그게 복수의 완성일까?

우리는 진도준과 얼마나 다른가

<재벌집 막내아들>은 진도준을 통해 우리가 선망하고 욕망한 것을 대신 구현한다는 점에서 달콤하지만, 그것이 능력주의 함정에 빠진 우리 사회의 고단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해 씁쓸하기도 하다. 진도준은 계급과 부의 대물림 문제와 능력주의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지만 굳이 그것을 극복하거나 보완하려 하기보다는 순응하며 일상을 지키려 한다. 그렇게 조직에 충성해 ‘머슴’에서 ‘집사’로 성공할 수 있으리라던 그의 소박한(?) 전망은 ‘죽음’이라는 좌절 이후 도리어 성공 욕망으로 승화돼 자신을 죽인 자본가의 방식을 계승한다. 진도준은 자신을 죽인 게 순양그룹 너머의 체제라는 고민을 하지 않는다. 다만 성공과 복수를 향해 달려갈 뿐이다. 우리는 그런 진도준과 얼마나 다른가?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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