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어른들은 잘 모르는 얘기일 듯하다. 전세계 3억 명이 쓰는 ‘제페토’의 평균 이용자 연령은 10살이다. 제페토는 아바타를 꾸미고, 가상공간에서 친구를 만나 놀고, 틱톡과 인스타그램처럼 이미지와 영상을 올리는 메타버스 플랫폼이다. 300만 명은 제페토에서 돈을 번다. 30대인 내가 요새 회사에서 주로 하는 일이 제페토 운영인데 스무 살 넘게 차이 나는 친구들을 대하려니 매번 조심스럽다. 이걸 좋아할까? 이건 왜 안 좋아하지? 아니, 이건 왜 좋아해?
25만 팔로어가 있는 제페토 크리에이터 IraEm님도 나와 연령대가 비슷하다. 그런데 IraEm님이 만드는 아이템과 피드에는 나와 같은 고민이 없어 보인다. 아주 과감하다. 귀엽거나 힙한 것이 대세인 제페토에서 나 홀로 어둡고 기괴하며 심지어 웅장하다. “제 아바타에 입힐 옷이 마땅치 않아서 아이템을 만들기 시작했거든요.” 이건 아마 아이들은 잘 모르는 얘기일 거다. 사실 IraEm님의 취향은 스팀펑크. 전자와 컴퓨터가 아닌 전기와 증기기계 중심의 18~19세기 산업혁명 시대가 쭉 발전했다면 맞이했을 미래를 상상하는 판타지 장르다. “스팀펑크에서 자주 등장하는 역병의사의 새 부리 가면을 모티브로 아이템을 만들었는데, 아이들이 전혀 모르더라고요. 아빠 새냐며, 멋지다고. 의도치 않게 유니크해졌어요.”
IraEm님의 유튜브 영상 추천을 받고 나니 그의 일관된 취향이 엿보였다. 그리고 질문이 떠올랐다. “혹시 이과세요?” ① ‘스팀펑크 세계관 덕후들을 위하여’라는 플레이리스트는 물론이고, 볼 것 없을 때 틀어둔다는 오토매틱 시계 영상 ② ‘How a Mechanical Watch Works’, 과학 채널 ③ <안될과학>의 긴급과학 시리즈, 그리고 내 추측을 확신으로 만든 ④ ‘이과생들을 위한 공부 플레이리스트’까지. 아이템과 피드에서 전문가의 손길이 느껴져서 당연히 디자이너의 사이드잡 정도로 생각했는데, 디자인과 전혀 상관없는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직장의 전산 업무를 하고 계셨다.
한편 비즈공예, 레진아트, 구체관절 인형 만들기, 그림 그리기 등 손으로 만드는 아날로그한 취향의 역사도 깊다. 제페토는 그야말로 IraEm님의 오만 관심사가 한데 모인 곳. 그래서 요즘은 열 취미 제쳐두고 제페토에 푹 빠져 있다. 레진이 다 굳어버릴 정도. 퇴근하면 모델링, 블렌더, 유니티를 공부하고 아이템을 만드느라 바쁘다. 정확히 말하자면 재미있으려고 바쁜 것이다. “제페토에서 유명해지고 수익도 나는 게 분명 동기부여가 되기는 해요. 그런데 저한테는 재미가 1순위예요.” 그렇다보니 제페토가 10대들의 놀이터인 것이 IraEm님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비록 유저들이 스팀펑크를 잘 모를지라도 그의 창작욕을 발산하기에는 최적의 공간이다. 명성과 수익은 덤이고. 아이의 놀이에서 찾은 어른의 재미다.
공 하나만 주면 온종일 뛰어노는 아이들과 달리 어른의 재미는 역치가 높아졌다고 생각했다. 새로울 것 없고, 의무와 책임의 무게 때문에 무언가를 좋아해도 기회비용을 생각하며 딱 감당할 만큼만 몰입한다고. 그런데 IraEm님을 보니 어른 나름인 것 같다. IraEm님은 나와 마찬가지로 공부하고 일하는 중에도 본인의 재미를 기어이 사수하고 본인이 더 재미를 느끼는 방향으로 발전시킨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잘 아는 어른이 자기결정권까지 가지면 극한의 재미를 누릴 수 있다.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는 감각은 귀하다. 이걸 잘 지켜내는 게 아이의 재미를 느끼는 어른으로 사는 비결 아닐까.
김주은 IP 프로듀서 (인스타그램 @alt.ctrl.shift)
❶ 스팀펑크 세계관 덕후들을 위하여 {Playlist}
https://www.youtube.com/watch?v=ExyoMIfu4pI
❷ How a Mechanical Watch Works
https://www.youtube.com/watch?v=9_QsCLYs2mY
❸ ‘메타버스’ 한 방 정리 <안될과학: 긴급과학>
https://www.youtube.com/watch?v=okfWhhWWtq0
❹ 이과생들을 위한 공부 플레이리스트(Playlist)
https://www.youtube.com/watch?v=T2cbogG1H4Y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주은 IP 프로듀서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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