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❶ 과들루프섬 영상(Guadeloupe, French Carribean 2020 4K) 유튜브 영상 갈무리
2007년 홍콩 완차이. 한국으로 치면 서울 종로3가 같은 지역이다. 구도심의 오랜 번화가라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런 곳엔 꼭 현지인들만 찾는 솜씨 좋은 작은 양복점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마흔 중반의 여자 혼자 슈트를 만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영어를 못한다는 것. 양복점을 찾아온 서른 후반의 한국 남자는 광둥어를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남자는 어설프게나마 그림을 그려 보여준다. 신기하게도 여자는 남자의 그림을 단박에 이해하고 남자의 몸과 마음에 꼭 들어맞는 옷을 만들어준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코드가 통한다는 게 이런 걸까. 이 양복점에서 맞춘 슈트를 입고 비즈니스 미팅을 하면 어쩐지 일이 더 잘 풀리는 기분이다. 어느새 여기서 맞춘 슈트가 스무 벌쯤 된다.
이 이야기로 만든 ‘베이스팅 데이’(Basting Day•가봉하는 날)라는 향수가 있다. 풀과 나무 향이 무게중심을 잡아주는데 그렇다고 너무 또 영국 신사같이 각 잡힌 느낌은 아니다. 자몽 향과 레몬 향이 산뜻하며, 세련된 뮈게(은방울꽃)와 파인(소나무) 향이 핏 좋고 날 선 셔츠를 떠올리게 한다. 완차이 양복점에서 맞춘 슈트처럼 중요한 일이 있는 날 입고 싶은 향이다.

❷ 파리를 1시간 동안 걷는 무편집 영상(Paris Evening Walk and Bike Ride - 4K - With Captions!) 유튜브 영상 갈무리
향수 브랜드 SRHY(사랑해요)의 서울 동대문 쇼룸에 가야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공식 웹사이트에 단 두 문장으로 압축돼 있던 걸 SRHY의 대표 K가 맛깔나게 풀어낸다. 또 다른 남자 10명의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를 들으며 바로바로 시향한다. 미국 인디애나주의 작은 라이브 클럽에서 난생처음 재즈 연주를 본 대학생의 순간을 담은 ‘밋 조플린’(Meet Joplin), 한국에서 하루 꼬박 걸려 들어간 과들루프섬에서의 아침을 담은 ‘브리즈 오브 샤인’(Breeze of Shine),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 거리에서 제대로 된 바닐라를 처음 먹어봤을 때의 환희를 담은 ‘바닐라 블룸’(Vanilla Bloom) 등.
쇼룸 한편에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영상으로 재생된다. ➊과들루프섬 영상을 보면서 ‘지금 봐도 이국적인데 2003년에는 오죽했을까’ ‘비행기 경유만 두 번 하며 극한으로 피곤이 쌓인 아침에 저 찬란한 해변을 봤다면 눈을 씻어낸 기분이었겠다’ 등등 경험한 적 없는 누군가의 한 순간에 해상도가 올라간다. ➋파리를 1시간 동안 걷는 무편집 영상을 보자니 이제 막 바닐라 맛에 눈뜬 사람이 또 다른 바닐라 디저트를 찾아 생제르맹 거리를 온종일 누빈 게 꽤 낭만적이었겠다 싶고.
완차이 양복점이 있을 법한 동대문 낡은 건물의 4층에서 이렇게 전세계가 펼쳐진다. 한때 전세계를 일터로 누비던 K가 인생의 새 챕터를 여는 공간이다. “11명 모두 실존 인물이에요. 다들 바쁘다보면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을 지나치고 잊게 마련인데 향으로 꺼내보고 싶었어요.” 그 11명에 본인도 들어가 있냐는 물음에는 빙긋 웃는다. “모두의 얘기죠. 남자 이야기를 담은 남자 향수지만 여성분이 더 많이 구매하는 데는 이야기의 보편성이 있는 것 아닐까요?” 하긴, 단 한 번도 슈트를 맞춰본 적 없는 내가 ‘베이스팅 데이’를 살지 마지막까지 고민했으니.
내 이야기를 향으로 만든다면 나는 어떤 순간을 꺼낼까. 전후로 인생이 바뀌어버린 너무 결정적인 순간은 아닐 것 같다. 그런 향을 매일 뿌리고 싶지는 않다. 잘라낸 단면에 내 삶의 여러 지층이 촘촘하게 겹친 아주 일상적인 순간이었으면 좋겠다. 남들이 들으면 기승전결 없는 노잼 스토리일지 모르지만 원래 인생이 그렇게 인위적인 게 아님을. K의 입담에 폭 빠져들어 듣기는 했다만 가만 보니 SRHY 향수의 스토리도 그렇다. 극적인 내러티브는 없지만 작고 소중하다. 비슷하게 겪었대도 다시 선명하게 떠올리기 어려울 기억들이다. 그 과거의 한 순간을 기어이 포착해낸 11명에게 삶은 꽤 향수할 만한 것 아니었겠는가.
❶ 과들루프섬 영상(Guadeloupe, French Carribean 2020 4K)
❷ 파리를 1시간 동안 걷는 무편집 영상(Paris Evening Walk and Bike Ride - 4K - With Captions!)
김주은 IP 프로듀서(@alt.ctrl.shift)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주은 IP 프로듀서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김건희 주가조작 유죄’ 신종오 판사, 숨진 채 발견…유서 남겨

이 대통령 “개헌 반대하는 사람, 불법계엄 옹호론자”…국회 표결 전날

트럼프 “교황, 이란 핵 용인”…교황 “진실에 토대해 비판해야”

트럼프 “한국 화물선, 미국 보호 안 받고 혼자 행동하다 피격”

종합특검, 한동훈 출국금지…‘대통령실 수원지검 수사개입 의혹’ 피고발

어린이가 꾸밈없이 묻자…이 대통령 “잘못하면 쫓겨나요”

사라진 발코니, 우리가 잃어버린 ‘집’의 숨통

변호사에 3300만원 받고 징역을 벌금으로 깎아준 판사…공수처, 기소

부산 북갑 박민식 “윤석열 영원한 대통령, 애국심 넘버원”…‘반탄 행적’ 소환

최불암 “한 여자 때문에 연극 떠나 방송행 결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