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홍콩 완차이. 한국으로 치면 서울 종로3가 같은 지역이다. 구도심의 오랜 번화가라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런 곳엔 꼭 현지인들만 찾는 솜씨 좋은 작은 양복점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마흔 중반의 여자 혼자 슈트를 만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영어를 못한다는 것. 양복점을 찾아온 서른 후반의 한국 남자는 광둥어를 할 줄 모른다. 그래서 남자는 어설프게나마 그림을 그려 보여준다. 신기하게도 여자는 남자의 그림을 단박에 이해하고 남자의 몸과 마음에 꼭 들어맞는 옷을 만들어준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코드가 통한다는 게 이런 걸까. 이 양복점에서 맞춘 슈트를 입고 비즈니스 미팅을 하면 어쩐지 일이 더 잘 풀리는 기분이다. 어느새 여기서 맞춘 슈트가 스무 벌쯤 된다.
이 이야기로 만든 ‘베이스팅 데이’(Basting Day•가봉하는 날)라는 향수가 있다. 풀과 나무 향이 무게중심을 잡아주는데 그렇다고 너무 또 영국 신사같이 각 잡힌 느낌은 아니다. 자몽 향과 레몬 향이 산뜻하며, 세련된 뮈게(은방울꽃)와 파인(소나무) 향이 핏 좋고 날 선 셔츠를 떠올리게 한다. 완차이 양복점에서 맞춘 슈트처럼 중요한 일이 있는 날 입고 싶은 향이다.
향수 브랜드 SRHY(사랑해요)의 서울 동대문 쇼룸에 가야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공식 웹사이트에 단 두 문장으로 압축돼 있던 걸 SRHY의 대표 K가 맛깔나게 풀어낸다. 또 다른 남자 10명의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를 들으며 바로바로 시향한다. 미국 인디애나주의 작은 라이브 클럽에서 난생처음 재즈 연주를 본 대학생의 순간을 담은 ‘밋 조플린’(Meet Joplin), 한국에서 하루 꼬박 걸려 들어간 과들루프섬에서의 아침을 담은 ‘브리즈 오브 샤인’(Breeze of Shine), 프랑스 파리 생제르맹 거리에서 제대로 된 바닐라를 처음 먹어봤을 때의 환희를 담은 ‘바닐라 블룸’(Vanilla Bloom) 등.
쇼룸 한편에는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영상으로 재생된다. ➊과들루프섬 영상을 보면서 ‘지금 봐도 이국적인데 2003년에는 오죽했을까’ ‘비행기 경유만 두 번 하며 극한으로 피곤이 쌓인 아침에 저 찬란한 해변을 봤다면 눈을 씻어낸 기분이었겠다’ 등등 경험한 적 없는 누군가의 한 순간에 해상도가 올라간다. ➋파리를 1시간 동안 걷는 무편집 영상을 보자니 이제 막 바닐라 맛에 눈뜬 사람이 또 다른 바닐라 디저트를 찾아 생제르맹 거리를 온종일 누빈 게 꽤 낭만적이었겠다 싶고.
완차이 양복점이 있을 법한 동대문 낡은 건물의 4층에서 이렇게 전세계가 펼쳐진다. 한때 전세계를 일터로 누비던 K가 인생의 새 챕터를 여는 공간이다. “11명 모두 실존 인물이에요. 다들 바쁘다보면 인생의 소중한 순간들을 지나치고 잊게 마련인데 향으로 꺼내보고 싶었어요.” 그 11명에 본인도 들어가 있냐는 물음에는 빙긋 웃는다. “모두의 얘기죠. 남자 이야기를 담은 남자 향수지만 여성분이 더 많이 구매하는 데는 이야기의 보편성이 있는 것 아닐까요?” 하긴, 단 한 번도 슈트를 맞춰본 적 없는 내가 ‘베이스팅 데이’를 살지 마지막까지 고민했으니.
내 이야기를 향으로 만든다면 나는 어떤 순간을 꺼낼까. 전후로 인생이 바뀌어버린 너무 결정적인 순간은 아닐 것 같다. 그런 향을 매일 뿌리고 싶지는 않다. 잘라낸 단면에 내 삶의 여러 지층이 촘촘하게 겹친 아주 일상적인 순간이었으면 좋겠다. 남들이 들으면 기승전결 없는 노잼 스토리일지 모르지만 원래 인생이 그렇게 인위적인 게 아님을. K의 입담에 폭 빠져들어 듣기는 했다만 가만 보니 SRHY 향수의 스토리도 그렇다. 극적인 내러티브는 없지만 작고 소중하다. 비슷하게 겪었대도 다시 선명하게 떠올리기 어려울 기억들이다. 그 과거의 한 순간을 기어이 포착해낸 11명에게 삶은 꽤 향수할 만한 것 아니었겠는가.
❶ 과들루프섬 영상(Guadeloupe, French Carribean 2020 4K)
https://www.youtube.com/watch?v=xWw1Lb7ZTzU
❷ 파리를 1시간 동안 걷는 무편집 영상(Paris Evening Walk and Bike Ride - 4K - With Captions!)
https://www.youtube.com/watch?v=1_XzrxXnwMM
김주은 IP 프로듀서(@alt.ctrl.shift)
*남들의 플레이리스트: 김주은 IP 프로듀서와 정성은 비디오편의점 대표PD가 ‘지인’에게 유튜브 영상을 추천받아, 독자에게 다시 권하는 칼럼입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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