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희 누나 보고 놀랐어. 그런데 나는 그럴 수 있죠. 다운증후군을 처음 봤어요. 그게 잘못됐다면 미안해요. 그런 장애가 있는 사람을 볼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학교, 집 어디에서도 배운 적 없어요. 그래서 그랬어요. 다시는 그런 일 없어요.”(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정준의 대사)
정준(김우빈)의 말처럼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발달장애인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 막상 만나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 정준은 애인 영옥(한지민)의 쌍둥이 언니 영희(정은혜)를 처음 만났을 때 당황해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시청자 역시 실제 다운증후군 장애인인 정은혜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영희로 등장했을 때 놀랐다. 드라마에 장애인 캐릭터가 종종 등장하지만, 장애인 배우가 직접 연기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더구나 정은혜는 배우들과 자연스레 어우러지며 감동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그는 전문 배우가 아니다. 캐리커처를 그리는 작가다. 지금까지 캐리커처를 그린 인물만 4천 명이 넘는다. 이를 모아 여러 차례 전시회도 열었다.
2022년 6월23일에는 캐리커처 작가로서 정은혜의 성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영화 <니얼굴>이 개봉한다. 영화는 아버지인 서동일(51) 감독이 만들었다. 정은혜 작가의 어머니 장차현실(58)도 딸처럼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또리네 집> <엄마, 외로운 거 그만하고 밥 먹자> 등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 또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낸 만화로 주목받았다. 5월31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카페에서 배우이자 작가인 정은혜(32)와 장차현실 작가, 서동일 감독, 정은혜의 동생인 서은백(16)군을 함께 만났다.
<우리들의 블루스>를 쓴 노희경 작가가 정은혜를 처음 만난 건 2020년 10월이었다. “드라마 자료 조사차 만나고 싶다고 연락이 왔고, 은혜의 전시회장에 노희경 작가가 왔다. 이후 동생 은백이와 함께 인터뷰하기도 했다. 그렇게 1년간 (노 작가와) 소통하다가 은혜가 직접 연기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2021년 11월부터 3개월간 촬영했다.”(서동일)
노희경 작가는 정은혜가 본래 자신의 모습을 살려서 연기할 수 있도록 대본을 썼다. 드라마에서 영희가 그랬듯이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것도, 항상 뜨개질하는 모습도 원래 정은혜의 모습이다. 드라마 마지막에 등장하는 영희가 그려준 영옥이 주변 사람들의 얼굴도 실제로 정은혜가 그렸다.
수많은 제작진과 배우가 함께하는 촬영 현장이 어색하진 않았을까. 정은혜는 “저보다 대선배들이고 잘해줘서 안 어색했다”고 말했다. 제작진이 정은혜가 배우들과 친해지는 자리를 미리 마련해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대본상 영희와 영옥은 쌍둥이고 정준은 (영희·영옥보다) 동생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 설정을 따르기로 했다. 은혜가 만나자마자 정준에게 반말을 했고, 실제 김우빈씨 나이는 몰랐다. 그러다 촬영 중에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것을 알았다. 촬영이 끝나고선 오빠라고 하더라.”(장차현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영희는 장애인이지만 단순히 ‘도와줘야 하는 사람’ ‘착한 사람’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영희는 술도 좋아하고 영옥에게 “나쁜 년”이라고 욕도 하는 ‘보통 사람’이다. 장차현실 작가는 “다운증후군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착하고 온화하다’고 나오는데 은혜는 성깔이 있고 화도 낼 줄 안다”며 “(드라마에서) 발달장애인도 자기 감정을 드러낼 수 있고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서 좋았다”고 말했다.
가족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드라마 속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서동일 감독은 영희가 ‘사람들을 그려주겠다’고 하는 말을 영옥이 거짓말로 여기는데도 제주도 ‘삼춘’(부모님뻘 어른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들이 영희에게 그림을 부탁하는 장면을 꼽았다. “영옥이가 ‘영희가 거짓말하는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어른들이) ‘그래도 그려나보게 해’라고 하는 장면인데, 영희의 그림을 본 적이 없는데도 믿고 맡기는 모습에서 응원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장차현실 작가는 정준이 사는 버스 안에 전시된 영희의 그림을 보고 영옥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꼽았다. 드라마 마지막 부분에서 영희가 제주도를 떠난 뒤 영옥은 영희가 진짜 그림을 잘 그린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한지민(영옥)이 촬영이 끝난 뒤 버스에서 나오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둘이 부둥켜안고 울었다. 나는 수없이 은혜의 그림을 봐온 사람인데도 그동안 만났던 4천 명의 사람이 생각나더라.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으면 이렇게 잘 그리게 됐을까’라던 영옥의 대사처럼 은혜를 살린 것도 그림, 그리고 사람이었구나 싶었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장애인의 가족이 겪는 고충도 현실감 있게 담았다. “왜 사람들이 영희 같은 애를 흔하게 못 보는 줄 알아? 대부분 시설에 보냈으니까. 나도 한때는 같이 살고 싶었어. 같이 살 집을 얻으려고 해도 안 되고, 일도 할 수 없고” 같은 영옥의 대사에는 장애인의 가족이 겪는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양평에 발달장애인이 750명 정도 있는데 450~500명이 (장애인) 시설에 있고 나머지는 다 집에 있다. 발달장애인은 갈 곳이 없으니 흔히 볼 수 없다.” 경기장애인부모연대 양평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장차현실 작가의 설명이다. “발달장애인은 하루 4시간만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기에 나머지 시간은 모두 가족들, 특히 엄마의 몫이 된다. 엄마는 일할 수도 없고, 일을 하려면 발달장애 아이는 방치된다. 최근 6살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아이와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건이 있었는데,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 체계가 구축된다면 이런 비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영희 부양은 내가 해야 한다”던 쌍둥이 동생 영옥의 모습은 정은혜의 동생 서은백군과도 어딘가 닮았다. “사람들이 (나를 두고) ‘애어른’ 같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특별한 누나를 가진 덕분에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장점이 있다.”(서은백) 장차현실 작가는 ‘애어른’이 되어버린 아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은백이가 어릴 때 내가 바빠서 밥을 안 차리고 있으니 자기가 알아서 챙기더라. 그 모습을 보고 기특하기보단 속상했다. 은백이보고 ‘네 성질대로 살아라. 착할 필요 없다’고 자주 말한다.”(장차현실)
정은혜는 기회가 온다면 계속 배우 활동을 할 생각이다. “앞으로도 연기 계획이 있냐”는 질문에 정은혜는 “무조건 오케이지”라고 답했다. “연기는 타고난 실력이에요. 대사는 그냥 대본 보고 연습했어요. 저절로 외워져요. 옆에서 ‘너 진짜 잘한다’ ‘귀엽다’ 소리 들려요.”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배우로서의 정은혜를 봤다면 다큐영화 <니얼굴>에선 작가로서의 정은혜를 볼 수 있다. 정은혜가 사는 경기도 양평에서는 매달 세 번째 주말마다 북한강변을 따라 프리마켓이 열린다. 물건을 파는 노점들의 줄이 1㎞나 된다. 지역 주민들이 셀러(seller)로 참여해 직접 키운 농산물과 손으로 만든 다양한 물품을 판다. 일자리를 찾지 못해 집에서 뜨개질만 하던 정은혜도 2016년 8월부터 캐리커처를 그려 판매하는 셀러로 나섰다. 어느덧 ‘스타 셀러’ ‘완판 작가’가 된 정은혜는 지금껏 4천 명 넘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렸다.
장차현실은 자신이 만화작가인데도 딸에게 그림을 가르칠 생각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정은혜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을 발견했다. “내가 운영하던 화실에서 은혜가 청소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느 날 학생들 옆에서 자신도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기에 잡지의 향수 광고에 등장하는 여성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때 그린 그림을 보고 내 가슴을 쳤다. 나는 그동안 은혜를 장애인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기대를 안 했던 거다. 나조차 은혜를 장애인으로 범주화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뒤부터 은혜의 작업실을 마련해주고 그림을 그리게 했다.”
서동일 감독은 정은혜가 작가로서 성장해가는 모습을 3년간 카메라에 담았다. 처음엔 영화로 만들기보단 그저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은혜의 일상을 기록하다보니 은혜가 다큐의 주인공으로도 매력 있는 캐릭터임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영화화를 준비했다.”
영화 속 정은혜는 사랑스럽고 유쾌하다. 다른 셀러들에게 “저 왔어요, 예쁜이”라고 인사하고 손님들이 몰려들면 “이놈의 인기는 피곤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어린이 손님이 자신을 이모라고 부르면 단호하게 “이모 아니고 누나. 그런데 남자는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노래와 춤을 즐기는 장면도 자주 등장한다. “예쁘게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손님들에겐 “원래 예쁜데요, 뭘”이라며 쿨하게 대답하고 ‘안 예쁘게’ 그려준다. 그저 자신의 눈에 포착된 대로 그릴 뿐이다.
서동일 감독은 정은혜의 매력을 드러내기 위해 최대한 엄마의 존재를 덜어내려고 애썼다.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장애 극복 같은 감동적인 서사가 아니라 발달장애인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얼마나 삶의 의지가 있는 사람인지였다. 엄마가 많이 등장하면 엄마의 고생이 드러날 수밖에 없고 신파가 될 수밖에 없다. 최종 편집본에서 엄마를 최대한 덜어냈더니 은혜의 매력이 잘 드러났다.”(서동일)
“사람들이 ‘그려주세요’ 할 때 행복해”서동일 감독은 <니얼굴>을 통해 발달장애인이 ‘주변인’ ‘경계에 있는 사람’이 아닌, 존재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발달장애인이 낯선 이유는 언어적 소통이 어려워서 그렇다. 이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바로 예술이다. 은혜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경계를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의 세계로 세상 사람들을 초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은혜에게 그림은 어떤 의미일까. “사람들이 ‘그려주세요’ 할 때 삶이 행복해요. 재미있으니까.” 장차현실 작가는 정은혜에게 그림은 ‘치유’라고 말했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편견 가득한 시선 때문에 은혜는 시선강박과 조현병을 겪었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줄 때 사람들은 은혜를 작가로 대하고 ‘예쁘게 그려달라’며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이 경험들이 은혜 스스로가 버텨내는 힘이 됐다.”
인터뷰가 끝난 뒤 정은혜가 먼저 “그림을 그려주겠다”며 내 얼굴을 사진 찍었다. “예쁘게 그려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그러자 정은혜가 말했다. “원래 예쁜데요, 뭘.” 안 예쁘게 그려줄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정은혜의 그림이 좋다. 정은혜를 꼭 닮은 그의 그림은 유쾌하고 매력적이니까.
글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사진 김진수 선임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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