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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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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은 왜 ‘파친코’에 1천억을 베팅했나

일본 시장을 포기하고 만든, ‘역사적 윤리성’에 충실한 드라마의 수수께끼
등록 2022-04-23 15:18 수정 2022-04-25 09:15
애플TV+의 막대한 돈을 투자받은 드라마 <파친코>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전략에서 여러 궁금증을 자아낸다. Apple TV+

애플TV+의 막대한 돈을 투자받은 드라마 <파친코>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전략에서 여러 궁금증을 자아낸다. Apple TV+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를 본 사람과 아직 보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나뉜다. 아이폰을 쓰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애플은 앱스토어, 아이튠스 등 자사 특유의 폐쇄적인 소프트웨어 정책을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애플TV+에 그대로 적용해 한국 시장에 출시했다. 애플 기기(하드웨어)를 가진 사람만이 애플TV+(소프트웨어)의 구독자이자 시청자가 될 자격을 얻는다. 그러니 애플의 바깥에 있는 사람은 다소 성가신 경로를 통해야만 그들 콘텐츠에 도달할 수 있다.

애플이 의도적으로 설치한 물리적 허들 탓에 <파친코>를 둘러싼 흥행 여부를 지금 당장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흥행하고 있는지조차 미지수다. 그러나 드라마를 봉쇄한 물리적·심리적 장벽(배타적 멤버십 정책, 모호한 흥행 여부, 다언어 콘텐츠의 낯섦)을 넘어 <파친코>를 보고 난다면 생각할 것이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인가?! 초국적 거대기업이 벌인 도박 같은 대하사극. 심지어 일본 시장을 포기하면서까지. 식민지 조선의 역사를 정통으로 돌파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에 애플이 1천억원을 베팅했다.

<파친코>는 소설 원작보다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등 더 정치적으로 변형됐다. Apple TV+

<파친코>는 소설 원작보다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인물을 만들어내는 등 더 정치적으로 변형됐다. Apple TV+

두 개의 시간대, 마법 같은 편집

‘태양의 나라’ 일본이 ‘세계 제일의 부국’ 미국을 추월할 거란 예감이 감도는 1989년. 미국 뉴욕의 투자은행가 솔로몬(진하)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일본 오사카에서 대규모 파친코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모자수(박소희)와 그를 일본에서 낳아 기른 할머니 선자(윤여정)는 한국에 뿌리를 둔 재일한국인이다. 솔로몬 역시 ‘자이니치’로 불리며 경계인으로서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솔로몬은 할머니에게 배운 한국어를 여전히 잊지 않고 사용하지만, 선자는 오랜 미국 생활 뒤 돌아온 손자가 어쩐지 낯설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미국인도 아닌 모호한 정체성을 안은 탓에 회사 프로젝트에서 길을 잃은 솔로몬. 선자는 부모의 고향 영도에서의 삶을, 그리고 전도사 남편을 따라 일본으로 이주한 이후의 삶을 떠올리며 4대에 걸친 평생의 기억을 불러온다. <파친코>의 시공간은 식민지 조선, 1919년 부산의 한 바닷가 마을로 옮겨가고 젊은 선자(김민하)는 생애 첫 번째 사랑 한수(이민호)를 만난다. 인생은 파도와 함께 요동치기 시작한다.

드라마 <파친코>는 두 개의 시간대(1910년대, 1980년대)와 세 개의 도시(부산, 오사카, 도쿄)를 마법 같은 편집을 따라 무작위로 오간다. 각본가 수 휴가 원작소설 <파친코>를 각색하며 스토리텔링(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을 전면 수정했기 때문이다. 휴는 선자 부모(1대)-선자(2대)-노아와 모자수(3대)-솔로몬(4대)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연대기를 ‘과거’와 ‘현재’ 두 시점으로 분리하며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명작 <대부2>(1974)를 절대적으로 참고했다. 그보다 어린 세대는 워쇼스키 자매와 톰 티크베어의 <클라우드 아틀라스>(2012)를 먼저 떠올리게 되리라. 어린 선자가 과거에 내린 선택들이 우연과 필연의 프리즘을 지나 할머니가 된 선자의 오늘을 바꾸고 조국의 역사를 미시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방식 때문이다.

1화에 제기되는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해본 적 없어?”라는 질문은 인생을 통틀어 선자가 내린 선택들(세상을 다 주겠다는 한수의 제안을 거절, 이삭과 결혼해 일본으로 이주, 손자 솔로몬을 미국으로 보냄)을 돌아보게 한다. 회상의 여정은 6화 대사 “내가 선택한 기다. 오래전이지만. 말만 하면 시상 다 준다카는 거 내가 싫다 한 기라”에 도착하며 선자의 인생을 한 톨 부끄러움 없이 자랑스럽고 당당한 것으로 규정하고 확정하기 이른다.

선자는 오랜 미국 생활 뒤 돌아온 손자가 어쩐지 낯설다. 4대를 가로지르는 선자(윤여정)의 회상은 그렇게 출발한다. Apple TV+

선자는 오랜 미국 생활 뒤 돌아온 손자가 어쩐지 낯설다. 4대를 가로지르는 선자(윤여정)의 회상은 그렇게 출발한다. Apple TV+

원작보다 더 정치적으로 변형된 이야기

<파친코>를 둘러싼 호평의 중심엔 ‘역사’가 있다. 특히 한국 관객에겐 본능에 가까운 반응이기도 하다.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모습을 공들여 재현하고, 드라마의 역사적 정합성과 연출의 윤리성을 보장받기 위해 스무 명 이상의 한국사·일본사·제국주의 연구자들을 자문위원으로 둔 사실을 밝혔다.

<파친코>는 4화에서 폭발하듯 드러나는 솔로몬의 충격적인 결심을 기점으로 원작을 좀더 정치적으로 변형한다. 이어지는 5화에서는 복희 언니(김영옥)의 대사 “언젠가 어떤 아재가 찾아와가 만주 공장에 좋은 일거리 있다고 우릴 소개시켜준다카데”를 통해 돌려 말하기 방식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뤘고, 6화에서는 원작의 설정을 크게 비틀어 선자의 남편인 목사 이삭(노상현)이 정치적으로 각성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것을 암시한다(“우리 아이는 이런 세상에서 살게 하고 싶지 않아, 형”). 원작에 없는 설정을 통째로 창작한 7화에서는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의 조선인 학살을 다루며 한수라는 주요 인물의 복잡성을 분석하고 이해하기에 이른다. 수준 높은 정치성과 역사성, 조심스럽지만 힘있게 가해자를 지목하고 피해자에 대한 애도를 최우선시하는 <파친코>의 세계는 한국인 사용자와 시청자 스스로가 견고하고 응집력 있는 존재로 느끼게 한다. 한국 시장의 상업적 호감을 획득하고 기업의 윤리적 역할을 동시에 충족하려는 목표이자 욕망. OTT 산업의 후발주자 애플TV+의 대한국 전략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애플TV+는 <파친코>를 통해 한국 관객의 호감을 얻는 대신 일본 시장에서의 비교우위를 사실상 포기했다. 일본은 애플 전체 매출에서 7% 정도를 차지하고, 국내 스마트폰 시장에서 아이폰 점유율이 45%에 달하는 금싸라기 땅이다. 애플TV+는 북미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일본과 한국 시장 모두에 2021년 말 후발주자로 도착했으면서도, 아시아 시장 첫 번째 공략 대상으로 일본이 아닌 한국을 선택했다. 일본 관객이 내뿜는 서늘한 적의를 감지한 걸까. 애플 채널에서 파친코를 홍보하지 않기로 한다.

젊은 선자(김민하)는 생애 첫 번째 사랑 한수(이민호)를 만나고, 인생은 파도와 함께 요동치기 시작한다. Apple TV+

젊은 선자(김민하)는 생애 첫 번째 사랑 한수(이민호)를 만나고, 인생은 파도와 함께 요동치기 시작한다. Apple TV+

10년 사이 확장된 아시아와 한국의 영향력

왜 일본이 아닌가. 왜 한국인가. 무려 5년 전부터 <파친코> 프로젝트를 준비했다는 설명을 듣고 나면, 애플의 베팅은 영화와 산업 전반을 어우르는 비평의 시각을 속속 참고해봐도 극히 무모하며 도전적인 선택이라 생각하게 된다.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자 로버트 J. C. 영은 자신의 책 <아래로부터의 포스트식민주의>(현암사 펴냄)의 한국어판 서문에 “비평가들은 인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아일랜드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한국은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쓴다. 영의 글은 2013년의 평가인데 2012년, 또 한 명의 세계적인 이론가인 인도의 가야트리 스피박은 푸네대학 세미나에서 “세계 전역에서 우리는 ‘아시아의 세기’ 운운하는 것을 듣고 있고 (…) 환유적으로 말해 여기서 아시아는 인도와 중국”이라고 말했다. 한국이 포스트식민적 시각으로 가장 흥미로운 사례 중 하나이면서도, 한국의 식민지 역사는 유럽과 아시아의 그 어떤 나라들보다도 학계와 문화, 그리고 자본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로부터 10년. 세계의 평가는 이제 “아시아는 한국”으로 대대적으로 수정됐다. 대륙판이 움직이는 듯한 충격적인 변화, 할리우드 역사상 처음으로 아시아계 창작자들의 존재가 부상하고 이 충격적인 변화에 한국 영화가 깊이 개입하고, 공헌하며, 묵직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만큼 분명한 건 없다. 21세기 한국 감독들은 동아시아 출신의 다른 감독들과 달리 자국에서의 성공 이후 더욱 즉각적으로 미국행을 택했다.

홍콩의 왕자웨이(왕가위), 대만의 허우샤오셴, 일본의 스와 노부히로, 구로사와 기요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모두 유럽행(정확히는 프랑스행)을 택한 반면, 한국의 김지운, 박찬욱, 봉준호는 커리어 전환기에 모두 할리우드로 진출했다. 우리와 인접한 이웃 영화계가 보여줬던 ‘동아시아적 경향성’에서 벗어난 이들의 선택은 2020년대 할리우드 K웨이브의 초석을 마련하게 했다. 우연일까. 애플TV+는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첫 작품 <닥터 브레인>(2021)을 김지운에게 맡겼고 <기생충>(2019)의 주연 배우 이선균을 캐스팅했다. 2013년 한국 감독들의 동시다발적 할리우드 진출, 같은 시기 시작된 넷플릭스 등 신생 OTT 플랫폼의 고속 성장과 다양성에 대한 막대한 투자, 2018년 ‘아시안 어거스트’(Asian August·미국에서 개봉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흥행을 지칭), 2020년의 <기생충>과 <미나리>, 2021년의 <오징어게임>에 이어 2022년 <파친코>가 세상에 왔다.

‘이야기에 대한 확신’은 ‘리스크’가 아니다

“파친코는 집단의 놀이이자 외로운 놀이다. 사람들은 자기 기계 앞에서 혼자 게임을 즐길 뿐, 옆 사람을 팔꿈치로 건드리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서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당신은 구슬이 구멍을 통해 핑핑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뿐이다.” 1970년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일본을 여행하며 파친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기호의 제국>).

그러나 2022년의 <파친코>는 다르다. 우리가 옆 사람을 팔꿈치로 건드리면 결국 서로 쳐다보게 될 것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파친코>를 기점으로 더 다양한 이야기에 대한 대중적 승인이 연쇄반응처럼 일어날 것”이라 예측한다. 잡지 <배니티페어>는 “어떤 이들은 애플TV+의 선택을 ‘도박’이라 말하지만, 이야기 자체에 대한 확신을 안고 프로젝트에 뛰어든 창작자들에겐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라 평하기도 한다.

좋은 이야기와 드라마에는 시청자도 반응하겠지만 제작자와 투자자도 <파친코>를 보며 서로의 팔꿈치를 건드릴 것이다. 여기에는 ‘윤리성’에 대한 반응도 있다. 넷플릭스와 디즈니+가 아시아를 겨냥해 그리고 소수자를 겨냥해 내놓은 콘텐츠를 살펴보자. 2020년대 들어 스트리밍 기업들이 저마다 어떠한 방식으로 ‘윤리적 자본’을 운용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넷플릭스는 ‘콘텐츠 추천’ 알고리즘의 결과를 따라 차기 흥행작의 조건을 꼼꼼하게 결정한다. 페미니즘, 성정체성(LGBTQ) 등의 항목이 들어가 있더라도 (자본의 영속을 위해서든 어떤 이유든) ‘차별’ 없이 성향을 받아들인다. 디즈니+는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며 케이팝 스타들을 전면에 내세운 시리즈를 제작하거나 방영한다. 넷플릭스가 알고리즘, 디즈니+가 스타의 힘을 믿고 포스트식민의 대지에 도착했을 때 애플TV+는 그 모든 규칙을 때려 부수고 이 자리까지 왔다. <파친코>가 성공한다면 OTT 시대의 ‘윤리적 자본’은 새로운 권력이 되어 대중문화 콘텐츠의 오랜 문법을 뒤흔들어버릴 것이다.

남지우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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