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나는 ‘쓰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21WRITERS①]에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767.html
한때 글쓰기는 전문가의 영역이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글을 쓰는 세상이 됐다. 그럼에도 사회에는 들어주는 사람이 적어서 말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 은유는 글을 통해 사람들의 고통이 연결되게 돕는다. 고통의 원인을 자기 자신을 넘어 사회구조에서 찾게 한다. 조금씩 삶은 나아진다. 첫 글쓰기 수업은 니체를 배우러 찾아간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열렸다. 수유너머 웹진에서 활동할 필진을 양성하려고 연 수업이었다. 이곳에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하며 사보 기자 일을 관둘 기회가 생겼다. 교직을 관두고 함께 철학을 공부하던 동료를 보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뷰파인더는 숨을 가다듬고 또박또박 읽기 시작했다. “지금껏 직장 동료들에게 아이의 장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아니 철저히 숨겨왔다. 내가 장애아의 엄마인 것은 사적인 영역이고, 직장은 직업인으로서 내가 일하는 곳이라는 구별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에 대해, 나의 마음 상태에 대해, 우리의 삶에 대해 온전히 다 설명할 수가 없어서다.” 그는 은유가 쓴 문장을 인용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떨리는 숨소리도 선명했다. “아이가 지체장애인이라면 나는 아이의 장애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자기표현능력과 의사소통, 경제활동 가능성을 기준으로 장애를, 아니 사람을 차별하는 마음이 무의식 속에 있음을 보게 됐다. 그러니까 나의 수치심은 장애가 아닌 발달장애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다시 들리는 목소리. “그런데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수가 있나. 누군가를 부끄러워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지 않나.” 울컥이던 목소리는 침착해져갔다. “떨리는 목소리로 어설프게라도 필요한 순간에 끝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내고 싶다.”
은유는 정돈된 언어로 막혀 있던 말과 글의 물꼬를 튼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글쓰기 수업을 열며 그는 ‘치유’라는 말을 정의했다. “치유는 은폐나 망각이 아니라 견딜 만한 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기억으로 더 이상 일상을 방해받지 않는 상황으로 만드는 것이겠지요. 불안과 고통을 안고 가는 것. 이것을 글쓰기가 도와줄 수 있을지, 조심스레 배움의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은유의 수업 소개 글이다.
그는 글쓰기도 “깊은 대화”라고 새로이 정의했다. “누군가의 생각을 곱씹어보고 나의 정렬된 생각을 사려 깊은 언어를 골라 이야기해요. 그걸 세상에 내놓고 다른 사람과 만나죠.” 글감도 일상에서 온다. “글쓰기 수업에서 만나는 ‘학인’(은유가 배우는 사람, 동료를 지칭하는 말. ‘수유너머’에서 쓰던 말을 따왔다)들, 내가 보는 영화들, 집회, 책 등 일상에서 글감이 와요. 열받는 이야기가 생기면 친구에게 말하고, 메모해보고, 계속 오래도록 생각하는 거죠.”
낭독이 끝나자 합평이 이어졌다. “이 글을 써주셔서 감사해요. 마지막에 목소리를 내고 싶다고 했는데요. 저는 그 목소리를 듣고 싶어요.” 한 학인이 말했다. 뷰파인더는 가져온 다어어리에 그 말을 꾹꾹 눌러 적었다. 그에게 옆에 있던 학인이 휴지를 건네줬다.
은유는 말을 아끼던 학인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화상회의 프로그램으로 한 여성이 말을 건넸다. “사랑하면서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수 있나. 얼마나 많이 고민하셨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 갑자기 남자아이가 화면으로 달려와 외쳤다. “엄마~!” 당황한 학인이 말을 이어갔다. “죄송합니다. 이 중요한 순간에… 까먹었다. 다시 할게요. 되게 준비하고 있었는데….” 뷰파인더가 웃었다.
은유는 글쓰기 수업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다. 그는 타인의 슬픔을 예민하게 알아차리는 사람이 돼갔다.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삶이 힘들어 보이지 않았냐고 묻자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분들은 피해자만이 아니에요. 자기 삶을 용기 있게 증언했어요. 세상이 나아지는 데 기여하셨어요. 그들이 쉽게 약자로 프레임화되고 슬픔을 해소하는 모습을 강조하려는 시선에 반대해요.”
타인의 고통을 듣는 일이 힘들지 않냐고도 물었다. “고통스러운 이야기는 힘들긴 하죠. 힘들면 같이 실컷 울고 다시 들으면 돼요. 그렇다고 제 감정에만 빠져들 수는 없으니까요. 용감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제가 잘 써야 억울함이 풀리고 세상이 바뀌니까요. 그리고 저는 배우는 걸 좋아해요. 사람한테 배우면 충만함이 느껴져요. 그냥 사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사람마다 고유하고 빛나는 부분도 보게 돼요. 슬픔을 알게 되는 것도 배우는 거예요. 감정 하나하나를 알고 슬픔 속에 기쁨이 있다는 점도 알게 돼죠. 미등록 이주아동을 인터뷰할 때, 자신의 고통을 언어화한 걸 봤어요. 엄청난 존경심이 생겼어요. 그러니까 힘이 나요.”
합평을 진행하던 은유가 글을 잘 쓰는 팁을 슬쩍 알려줬다. 영업비밀이라며 숨겨온 인용의 비결이었다. “읽고 소중한 책이라 생각이 들면 예전엔 필사를 했어요. 지금은 노트북으로 타이핑을 해요. 보통 책을 읽으면 좋은 문장이 남는데 문제는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필사한 문장을 여러 번 읽어서 외워야 해요. 완전히 입력됐을 때 그 문장을 글에 쓰면 내 것이 돼요.”
은유는 다이어리에 문장을 적어 들고 다닌다. 집에는 필사노트를 쌓아뒀다. “문장을 노트에 적어놓고 계속 생각해요. 그 문장을 이야기하고 외우고 발효시키며 계속 오래 생각해요.” 은유가 학인들과 함께 읽은 책 <마이너 필링스>(캐시 박 홍)에는 “병이 병으로 명백히 진단되지 않으면 자식이 그 멍에를 짊어진다”는 문장이 나온다. 그는 이 문장을 노트에 적은 뒤 외웠다. 학인들이 쓴 문장도 곱씹었다. “배우자가 우울증을 앓았는데 그가 아픈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헷갈렸다.” 그는 이 문장을 기자에게 들려줬다.
글쓰기 수업이 끝나고 뷰파인더와 함께 지하철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은유 작가님은 글쓰기 기술이나 책 내는 방법을 가르치는 걸 목표로 하지 않아요. ‘글쓰기는 자기 삶의 해석권을 내가 가져오는 행위’라고 하셨는데요. 삶을 촘촘히 들여다보고, 더 나은 사람으로 잘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해요.”
그에게 은유로부터 들은 합평이 어땠는지 물었다. 은유는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것, 당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쓰면 글이 더 명료해질 거라고 말했다. “아직 직장에서 아이의 장애를 말하는 건 어렵지 않을까 싶어요.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거든요. 이제 서서히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은유가 계속 글을 쓰게 하는 힘은 뭘까. “내가 본 어떤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제 목표는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것이에요. 당위를 말하는 글은 많지만 잘 안 읽어요. 도덕적 정당성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죠. 아름답고 설득력 있게 쓰는 일이 중요해요.”
쓰는 사람. 쓰게 하는 사람. 쓰면 삶과 세상이 바뀐다고 믿는 사람. 은유를 이루는 모습이다. 셋 중 어떤 모습이 가장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 “세 정체성이 다 제게 맞물려요. 글쓰기로 타인을 섬세하게 보고, 세상도 좀더 깊게 보고, 내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더 좋게 만들었어요.” 은유의 말이 돌아왔다. 쓰는 사람 은유가 계속 써가기를. 사람과 세상을 더 담아주기를 소망하게 됐다.
전화기 너머 체온이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저 왔어요.” 숨을 헐떡이며 뛰어온 은유가 말했다. 약속보다 10분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분홍색 폴라티 위에 코트를 걸친 그가 보였다. 이화여대 후문 카페. 이곳은 종종 찾는 작업 공간이다.
은유는 작가보다 ‘글 쓰는 사람’으로 불리는 게 더 좋다고 했다. 글을 쓰게 됐어도 언젠가는 쓰지 못하게 될까봐서였다. 어떤 작가는 쓰지 않아도 한 번 썼다는 이유로 계속 작가로 불린다. 글 쓰는 사람은 다르다. 쓰지 않으면 이름을 잃는다. 어쩌면 은유는 작가보다 더 치열한 이름으로 불리지 않나 싶다.
누군가는 글을 쓰며 스스로의 삶을 구원한다. 그렇다고 글쓰기 노동이 마냥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렇게 있으면 글 쓰는 것처럼 보이려나요? 글 쓰는 게 할 일이 없어 보이잖아요. 멍하니 생각만 하는 것 같아서.” 글 쓰는 모습을 사진작가가 촬영할 때 은유가 말했다.
은유는 자신처럼 잘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그가 출판노동자를 인터뷰한 책 <출판하는 마음>을 쓴 이유다. “편집자라고 모든 출판 직군을 자세히 알진 못해요. 은유 작가님을 통해 업계 동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일하는지 알게 됐어요. 이 일을 세심하게 관찰해줘서 고마웠어요.” 은유와 함께 <있지만 없는 아이들>을 낸 최지수 편집자의 말이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실히 글을 쓰는 동력. 사람들과 함께 글을 배워가려는 태도. 말과 글의 힘을 믿고 실천하려는 신념까지. 은유를 만나 배운 글쓰기였다.
이정규 기자 j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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