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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 나는 ‘쓰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21WRITERS①]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쓰기의 말들> 쓴 은유 작가 인터뷰
등록 2022-03-25 16:09 수정 2022-03-28 09:26
사진=박승화 기자

사진=박승화 기자

은유(51). 글 쓰는 사람. 글쓰기 수업도 한다. 활동가이기도 하다.

서른다섯 살 경력단절 여성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자기 방이 없다보니 동그란 식탁이 작업대였다. 아이들 밥 챙기고 그릇 치우고 책을 읽었다. 김칫국물 닦고 노트북을 펴고 글을 썼다. 집안 경제가 어려워져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몇 번의 취업 서류 탈락 끝에 은유는 카페에 붙은 구인 메모까지 살펴봤다. “지영(은유의 본명)아, 왜 구인광고를 봐?” 직장동료였던 김금숙씨가 물었다. “언니, 나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해.” “무슨 일을 해? 잘하는 일을 해야지. 글 잘 쓰잖아.” 금숙씨는 은유가 기업 잡지에 글을 쓸 수 있게 도왔다. 둘은 증권회사에서 노조 소식지를 만드는 일로 만난 인연이었다.

본래의 자아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사보는 꼭 쓰고 싶은 글은 아니었지만 글쓰기는 좋았다. 좋은 엄마가 되기는 어렵더라도 아이들에게 밥 세끼는 꼭 챙겨주겠다고 다짐했다.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다가 부엌에서 부침개 끄트머리가 지글지글 타고 있으면 잽싸게 뛰어가 부침개를 뒤집고 와서 또 다음 문장을 써내려갔다. (…) 부침개를 뒤집는 동안 아이디어가 반짝 떠올라 원고의 제목을 정하기도 했다.”(<올드걸의 시집>) 그런 그에게 글쓰기의 루틴(습관)이란 없었다. 쓸 수 있을 때 글을 써뒀다. “유연해야 했어요. 아니면 글을 못 썼을 거 같아요. 삶을 통제할 수 없고 변수가 생기면 받아들이는 게 숙명이었어요.”

은유가 ‘자유기고가’ 명함을 들고 처음 글쓰기를 한 때는 2005년이다. 쓰고 또 쓰며 7년이 지났다. 그가 블로그에 모아둔 글이 모여 첫 에세이집이 2012년 나왔다. 은유의 문장에는 일상이 주는 무게가 보였다. “일을 마치고 늦은 밤 귀가하면 식구들은 잠들고 집이 난장판이 되어 있곤 했다. 식탁 위에는 라면 국물이 반쯤 남은 냄비와 뚜껑도 닫지 않은 김치 보시기, 고춧가루 묻은 젓가락이 엑스자로 놓여 있었다.”(<올드걸의 시집>)

삶에서 은유가 느낀 감정은 시와 만나 <올드걸의 시집>이라는 제목의 책이 됐다. 올드걸은 돈이나 권력, 자식이 아니라 본래의 자아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존재라고, 늘 느끼고 의심하고 배우는 ‘감수성 주체’라고, 일상에서 찾아낸 자기 언어였다. 은유는 본인의 것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는 증권회사를 그만두고 주부가 됐지만 ‘서태지와 아이들’ 팬클럽에서 활동하며 글을 썼다.

은유는 10여 권의 책을 쓴 중견작가다. 주로 에세이, 인터뷰, 르포르타주 등 논픽션을 썼다. 미등록 이주아동, 국가폭력 피해자, 성소수자, 폭력피해 여성, 산업재해 노동자를 만났다. 2022년 3월8일 오후 3시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후문의 한 카페에서 은유를 인터뷰했다. 같은 날 저녁 7시30분, 독립서점에서 열린 은유의 글쓰기 수업 ‘메타포라’에도 참석해 취재했다(수업 장면은 푸른색으로 표시했다).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위치한 이후북스. 이곳은 벽과 책장이 조명으로 하얗게 빛나고 빠른 비트의 얼터너티브록이 들리는 독립서점이다. 서점의 부대표는 은유의 글쓰기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은유는 페미니즘 강의를 열던 공간이 서점이 되게 도왔다. 책장에는 은유가 쓴 책을 비롯해 페미니즘, 퀴어, 비건, 기후변화 등을 주제로 하는 책이 꽂혀 있다.

서점 한편 커튼 너머로 작은 부엌이 보였다. 그 옆 커다란 네모 탁자가 자리한 공간에서 글쓰기 수업이 열렸다. 현장에는 3명이 왔다. 원격화상회의 프로그램으로 연결된 또 다른 20여 명은 서울, 통영, 프랑스 파리 등 곳곳에서 참여했다. 은유는 별명을 일일이 부르며 안부를 물었다.

수업은 은유에게 온 손편지를 읽으며 시작됐다. “느리고 신중한 인사를 전하고 싶어요. 그래서 편지를 써요.” 은유의 글쓰기 수업에 6년 전 처음 함께했던 청년이 보낸 글이었다.

편지를 보낸 청년은 함께 글을 쓰며 삶의 동력을 얻었다고 말했다. 나인 채 있어도 편안한 사람들과 함께 긴 시간을 보내는 것. 나인 채로 살며 세상에 공해가 되지 않는 글을 쓰는 것. 글쓰기 공동체에서 얻은 경험이었다.

은유가 2022년 3월8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이후북스에서 글쓰기 수업 ‘메타포라’를 진행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은유가 2022년 3월8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이후북스에서 글쓰기 수업 ‘메타포라’를 진행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쓰고 나면 울컥하던 마음이 평범해졌어요

은유의 글쓰기를 관통하는 문장이 있다.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은 누구나 약자다.”(<글쓰기의 최전선>) 고통을 말할 정도로 정돈된 언어가 없으면 쉽게 침묵하게 돼서다. 억울함이 쌓이고 폭력에 노출되고 약자가 된다. 은유도 자기 언어를 찾는 시간을 보냈다. 서른다섯 살,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경력단절 여성으로 집필노동자라는 직업을 택한 은유. 돌봄노동과 가사노동도 포기할 수 없었다. 세 가지 일을 다 잘하려니 울컥하는 일이 많았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늦은 밤. 아이들과 남편이 잠자고 있었다. 어질러진 집 안을 보며 무엇인지 모를 감정을 마주했다. “나도 내 마음을 잘 몰랐어요. 감정이 덩어리 같았어요. 일하며 아이도 키우는 일은 너무 힘들었거든요. 작은 존재인 아이들은 예뻤고 아이들에게 엄마는 중요했어요. 아이들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한 복잡한 감정이었습니다. 쓰고 나면 감정이 평범해졌어요.”

20대부터 50대까지 여성이 대부분이지만 남성도 몇몇 수업에 들어왔다. 3주차 수업이 열린 이날엔 아이를 키우는 50살 직장인 여성이 처음으로 현장수업에 참여했다. 그의 별명은 뷰파인더.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할 순서가 되자 그는 종이를 양손으로 꾹 쥐었다. 글은 직장에서 겪은 차별이 담긴 시선으로 시작됐다. 새벽 내내 잠 못 이루고 써온 글이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글을 낭독했다. 직장에서 비정규직 직원 한 명이 계약이 끝나자 어떻게 인원 충원을 할지 논란이 일었다. ‘장애인고용법’을 위반해서 범칙금을 내는 대신, 이참에 장애인을 새로 직원으로 뽑자는 제안이 나왔다. 동료들은 반발했다. “장애인을 고용해서 사고가 나면 산재로 더 큰 비용이 생긴다. 장애인이 우리 부서에 오면 부서 일이 가볍고 우스워진다.” 글을 읽던 그의 호흡이 떨렸다.

글쓰기가 삶과 세상을 바꾼다고, 은유는 믿는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쓰면 세상이 좋아진다.” 그가 지침으로 삼는 이오덕 선생의 말이다. 일하는 사람은 당사자로 넓어진다. 그의 글쓰기 수업을 듣는 사람들은 성폭력, 가정폭력, 직장 내 괴롭힘 등 겪은 피해를 글로 쓰며 드러내게 된다. “쓰게 되면 말 못한 일을 털어놓게 돼요. 약점이고 결핍이어서 말을 못하다가도 글을 쓰면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니까요. 많은 고통이 말해지고 써지고 바깥으로 드러나야 해요. 전면화돼야 해요.”

쓰는 사람인 그는 어떤 모습의 활동가일까. “은유의 훌륭한 점은 1인 활동가라는 거예요. 조직도 없지만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항상 가요. 삼성 반도체 반올림 투쟁할 때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싸울 때도, 저기 먼 지방의 교육현장에도 은유는 달려갔어요. 조직 방침을 가지고 한 말들은 반향을 못 일으켜요. 은유의 글은 응원이 되고 깃발이 됐어요. 사람들이 참여하게 했어요. 고맙고 소중한 존재예요.” 금숙씨의 말이다.

*은유, 쓰는 사람, 쓰게 하는 사람, 쓰면 삶과 세상이 바뀐다고 믿는 사람 [21WRITERS②]으로 이어집니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1768.html

출간 목록

은유는 에세이집 <올드걸의 시집>(청어람미디어, 2012),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서해문집, 2016), <다가오는 말들>(어크로스, 2019) 등을 썼다. 인터뷰집으로 <폭력과 존엄 사이>(오월의봄, 2016), <출판하는 마음>(제철소, 2018),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돌베개, 2019), <있지만 없는 아이들>(창비, 2021) 등이 있다. 글쓰기를 알려주는 책으로 <글쓰기의 최전선>(메멘토, 2015), <쓰기의 말들>(유유, 2016)을 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에서도 글쓰기 팁을 배울 수 있다.

모든 글이 글쓰기 책

쓰는 사람 되는 법

20대의 은유는 증권회사 노조 소식지에 인터뷰 기사를 주로 썼다. 30대의 은유는 기업잡지에 실리는 글을 썼다. 사수가 글쓰기를 가르쳐줬지만 체계적으로 글을 배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집필노동자로서 글쓰기를 독학으로 해냈다. 우선 글쓰기 책을 사서 모았다. 조사를 바꿔보고 부사와 형용사를 쓰지 말라는 실용서적을 샀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글을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도 샀다. 소장한 글쓰기 책은 30권이 넘어갔다. 쓴 글이 괜찮은지 글쓰기 책을 보며 점검했다. 그때 모아둔 글쓰기 명언을 엮어 <쓰기의 말들>이란 책도 펴냈다.

글쓰기에 몰입하자 모든 텍스트가 글쓰기 책으로 보였다. <전태일 평전>은 글쓰기 교본이 됐고, 요리책에 나오는 레시피도 글쓰기 순서를 알려주는 듯 보였다. 은유는 왜 글을 잘 쓰고 싶었을까. “프리랜서니까요. 제 글은 매번 자본의 심판대에 올랐어요. 잘 쓰지 않으면 연락이 안 와요. 잘 쓰고 싶었고 뭔가를 최대한 표현해냈을 때 쾌감이 있었어요. 나와 같이 일하려 하고 고마워하는 사람도 만났고요. 그 재미도 컸죠.” 대학졸업장이 없어 시장에 통용되는 작가임을 증명하기가 때론 어려웠던 은유. 그는 마감을 어기지 않고 제때 글을 써냈다. 어느덧 그는 사보 기획자들이 함께 일하고픈 작가로 소문났다.

더 잘 쓰고 싶었다. 글을 고치고 또 고쳤다. 은유는 글을 쓰고픈 이들에게 일단 엉성하게라도 초고를 써보라고 권유한다. 글은 계속 고치면 좋아지기 때문이다. “나만 보려고 쓴 글들도 고치고 또 고쳤어요. 조사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글이 단정해졌어요. 접속사도 빼보고 단어도 교체하고 내 글이 조금 더 나아지는 기쁨을 느꼈어요.” 글쓰기에 대한 열정 덕분일까. 7년간 블로그에 쌓아둔 은유의 글은 책으로 나왔다.

좋은 글을 쓰려면 집념만으로는 부족할 듯싶다. 논픽션 작가의 능력을 물었다. 은유는 판단하지 않는 힘을 꼽았다.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 해요. 판단이 강할수록 사람과 사물, 현상을 있는 그대로 못 보잖아요. 전달자로 온전한 역할을 하려면 판단하지 않고 의심해야 해요. 소설가가 자기가 구축한 세계에서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면, 논픽션 작가는 가장 아래서 세상을 보고 기록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미등록 이주아동, 특성화고 현장실습생, 국가폭력 피해자 등 한국 사회의 낮은 곳에 있어 잘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들과 작업할 수 있던 힘도 제가 무엇을 알아서가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나왔어요. 알지 못하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게 논픽션 작가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정규 기자 jk@hani.co.kr

*한겨레21이 사랑한 논픽션 작가들 모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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