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둘래 제공
내가 영월로 이사 가기 전까지는 사는 데 바빠 이종사촌 동생이 어디 사는지 몰랐습니다. 어디 사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요. 동생네는 영월에 터 잡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동생 남편은 영월 토박이에 키가 180㎝ 훌쩍 넘게 크고 아주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위로 딸 하나에 아들 둘을 두었습니다. 둘째는 우리 아들과 동갑입니다. 동생은 남편을 도와 사업도 잘하고 살림도 잘하는 사람으로 평이 나 있었습니다.
막상 낯선 곳으로 이사하고 보니 사촌 동생이 큰 힘이 돼줬습니다. 동생은 자기가 뭐 언니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돌봐줬습니다. 이사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모임을 한 번도 안 해본 사람들끼리 친목계를 하나 만든다고 나도 끼워줬습니다. 회비를 조금씩 내서 한 달에 한 번 집에서 밥하지 않고 남이 차려주는 밥을 사먹기로 했습니다. 매달 제일 맛있게 하는 집을 골라 가장 맛있는 것을 골라 먹었습니다. 친목계라는 것을 처음 해보았는데, 한 달에 한 번 마음 놓고 외식하는 날이 기다려졌습니다.
몇 번 만나 밥만 먹다보니 그러지 말고 회비를 조금 내서 그달 그달 뽑기 계를 하자고 했습니다. 동생은 자기는 남편 몰래 삥땅해서 곗돈을 낸다고 했습니다. 동생 남편은 꼭 돈 안 되는 감투나 쓰고 돈 쓸 일만 만들어서 이렇게라도 돈을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이 딴 주머니도 찰 줄 알아야 아쉬운 일이 생기면 쓴다고 합니다. 나도 생전 처음 딴 주머니라는 것을 챙기기로 하고 생활비에서 더 아끼고 짜서 곗돈을 부었습니다. 동생은 두 구좌를 들었습니다. 한 구좌는 재수 좋게 맨 먼저 뽑아서 빚을 갚았고, 한 구좌는 받으면 자기가 쓸 거랍니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에 동생이 긴팔을 입고 와서 “언니 이거 좀 봐. 호랑이한테 물렸어” 하며 팔을 걷어 올리고 보여줬습니다. 팔에는 큰 이빨 자국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요즘 장사가 잘되는데 왜 돈이 없냐고 했답니다. 곗돈 두 구좌를 내다보니 돈이 조금 비는 것이 티가 난 모양입니다. 그래도 동생은 “누가 돈을 빼돌리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따져보자”고 남편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떨어지지 않자 남편이 큰 입으로 팔을 꽉 깨물어놓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나는 놀라서 “무슨 배짱으로 거인 같은 남편한테 덤벼드나. 그러다 그 큰 주먹에 한 대 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했더니, 동생은 “나는 옳은 일만 하기 때문에 남편은 나한테 꼼짝도 못해” 합니다.
우리가 영월로 이사 오기 전 동생네는 여관을 했는데 잘됐답니다. 여관이 잘되니 자기한테 맡겨놓고 남편은 가건물을 하나 빌려 슈퍼를 하나 운영했답니다. 여관도 잘되고 슈퍼도 잘되던 어느 날 밤에 슈퍼에 불이 나서 완전히 잿더미가 됐습니다. 여관을 정리해서 피해를 보상해주고 나니 이십만원이 남았답니다.
남편은 노름이라도 해서 돈을 따서 살겠다고 며칠을 노름하더랍니다. 처음에는 조금 따는 것 같았는데 어느 날 몽땅 털리고 와서는 밑천이 조금만 있으면 잃은 돈을 복구할 수 있다고 했답니다. 밤에 잠을 안 자고 눈에 불이 철철 떨어지는 게 무슨 사고라도 칠 것 같은 기세였답니다. 전 재산 이십만원을 주면서 이거 가지고 가서 재수 좋아 돈을 따면 다행이고 잃어버리면 그냥 집으로 오라고 했답니다.
남편은 그 밤에 이십만원을 홀라당 잃고 아무 말 못하고 집에 들어와 조용히 살았답니다. 다시 일어설 때까지 동생은 길거리에서 풀빵도 굽고 여름이면 옥수수도 쪄서 팔고 노점을 해 먹고살았답니다.
그런데 요즘도 남편은 자꾸만 한숨을 쉬며 살맛이 안 난다고 오만상을 찡그리며 산다고 걱정합니다. 동생은 계 타던 날 남편의 문제를 해결해줬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물었습니다. 사업 확장을 하면 떼돈을 벌 수 있는데 돈이 없어서 못한다고 한탄하더랍니다. 얼마면 되겠냐고 물으니, 어떻게 알았는지 딱 계 탄 돈만큼이어서 이 돈 가지고 사업 확장해서 잘 살고 다시 한숨 짓지 말라고 했답니다. 사업을 확장했지만 별로 재미를 볼 만한 품목이 아니어서 잘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제부는 이후로 동생 앞에서 이런저런 소리를 못하고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서점에는 많은 학생이 들락거렸습니다. 그중 소문나게 공부를 잘하는 기훈이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고모네 집에서 산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누구보다도 밝고 정직하고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들도 다 기훈이 기훈이 하며 칭찬했습니다. 전국 모의고사에서 강원도 1등을 할 정도라 합니다.
기훈이는 서점에 자주 놀러왔습니다. 서점에 들르면 시키지 않아도 자기 집처럼 스스럼없이 서점을 돌봤습니다. 농담도 잘하고 싹싹하니 아이들도 잘 따랐습니다. 기훈이가 오면 가게를 맡겨놓고 마음 놓고 볼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게를 비우고 어디를 갔다 오면 무슨 책을 팔고 어떤 사람이 사가고 안 봐도 다 보일 만큼 기록을 상세하게 해놓습니다. 가게에서 특별한 일이나 감동받은 일도 기록해놓았습니다. 글 쓰는 재주가 있어 아주 읽을 만하게 써놓았습니다.
노트에 인상 깊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문제집을 사면 추첨권을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첨되면 일등은 피아노입니다. 모두 추첨권을 얻어가느라 난리였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문제집을 사서 추첨권을 드렸더니 안 가져가더랍니다. 왜 안 가져가느냐고 물었더니 아주머니는 사람에겐 평생에 행운이 세 번 오는데 피아노 하나로 때우는 작은 행운은 바라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기훈이가 왜 그렇게 장사를 잘하는가 했더니 함께 사는 고모네가 장사했는데 어린 시절부터 도와서 몸에 익었답니다. 고모네 가게에는 외상장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형과 기훈 학생이 장부를 가지고 놀다가 쓰레기통에 버렸답니다. 고모와 고모부가 외상값을 받으러 가려고 장부를 찾았습니다. 형과 기훈이가 버렸다고 하니 고모 내외는 쓰레기장에 달려가 샅샅이 뒤졌습니다. 버린 지 며칠 되어 찾지 못했습니다. 고모와 고모부는 앓아누워 몇 날을 못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이 혼났겠다” 하니 그래도 고모 내외는 조카 형제를 야단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럿이 듣고 있다가 한마디씩 했습니다. “느네 고모는 성자 아니냐.” “그렇게 통 큰 사람들이라 기훈 학생을 이렇게 훌륭하게 키웠구나.”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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