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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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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훔치는 아이, 카드 훔치는 숙녀

책 도둑 잡으러 1킬로미터 뜀박질
등록 2021-10-11 07:01 수정 2021-10-12 01:18
구둘래 제공

구둘래 제공

서점을 시작하고 서점 일이 아직 낯설 때였습니다. 주문한 일도 없는데 하루는 범우사에서 문고판 명작선과 위인전이 두 상자나 왔습니다. 그날도 짐이 와서 무엇인가 풀어봤더니 만화책이었습니다. 만화책을 정리하고 있는데 남자애가 여러 명 떼 지어 들어왔습니다. “아줌마, 책 구경해도 되지요?” 하면서 수선을 떱니다. 책을 보는 척하면서 자꾸만 흘금흘금 눈치를 봅니다. 여러 명이 한 아이를 은근히 감싸고 둘러섭니다. 한 아이가 티셔츠 목을 벌리고 책을 쓱 집어넣었습니다. 책은 티셔츠를 타고 허리 쪽으로 툭 떨어졌습니다. 아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도망갔습니다. 다른 아이들도 우르르 도망갔습니다.

책이 보고 싶은 걸까, 훔치고 싶은 걸까

며칠 있다 아이 세 명이 들어왔습니다. 제 딴에는 머리도 깎고 옷도 갈아입고 왔는데 요전에 책을 훔치려던 애들이 분명했습니다. “아줌마, 이 만화책 얼마예유?” 자꾸만 이 책 저 책 책값을 물어봅니다. 책 뒤에 정가가 나와 있다 해도 계속 물어봅니다. 오늘은 아주 작심하고 온 모양입니다. 만화책을 티셔츠 목을 벌리고 배 속으로 쏙 집어넣었습니다. 티셔츠 밑단을 바지 속으로 넣고 허리띠를 단단히 매고 와서 책이 흘러나가지 않았습니다. “야야, 그 책 꺼내놔라” 하는데 벌써 문을 열고 도망가는 겁니다.

나도 뛰어 따라갔습니다. “네가 어디까지 뛰어가나 보자. 내가 끝까지 쫓아가서 잡고 말 테다. 정 책이 갖고 싶으면 한 권 달라고 하면 줄 수도 있는데, 어린놈들이 도둑질이라니~” 하며 일송서점에서 동강까지 거의 1킬로미터 되는 길을 뛰어서 따라갔습니다.

거의 잡힐 듯 잡힐 듯하며 강가에 다다르자 애들이 여울물을 첨벙첨벙 건너서 갑니다. 동강이 여울물이었으니 망정이지 청령포처럼 깊은 물이 나왔으면 어떡할 뻔했나 싶습니다. 급한 마음에 뛰어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아찔한 마음이 듭니다. “이놈들! 내가 얼굴을 다 아는데 꼭 잡을 수도 있지만 한 번만 봐줄 테니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라~.” 등 뒤에 대고 소리쳤습니다. 도둑은 잡지 못했지만 왠지 웃음이 나와 허허허 웃으며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가게를 비워두고 어디 갔다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책 도둑을 잡으러 갔다 오는 길이라고 했더니 힘도 좋다고 했습니다. 내가 애들 뒤를 따라 뛰어가는 것을 본 이웃 사람들이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습니다. 강물을 건너 도망갔다고 하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다, 마라톤 선수였냐, 운동 한번 잘했겠수야~ 하며 놀립니다.

나도 초등학교 때 계주를 뛰어보고 처음 먼 거리를 달려봤습니다. 애들이 책이 보고 싶은 걸까, 훔치고 싶은 걸까 궁금해집니다. 애들은 클 때 호기심으로 한번씩 훔쳐보기는 하는데 훤한 대낮에 버젓이 주인이 보는 앞에서 책을 들고 갔으니 도둑이 분명한 것 같기도 합니다. 하긴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라던데 제발 호기심에 한 번으로 끝내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손님 들어오는 것 보면 살지 안 살지 보여

영월에서 소문나게 공부 잘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전국 모의고사에서 1등을 했다는 연수는 학교가 끝나면 서점에 와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대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의 로망이 나중에 서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이다음에 서점을 하면서 보고 싶은 책을 실컷 보고 살겠답니다. 학교가 끝나면 자칭 점원이라며 서점에 와서 책을 보고 심부름도 해주고 갔습니다.

11월 초가 되니 여기저기서 카드 상자가 매일 화물로 도착했습니다. 한 번도 연락해본 적 없고 주문한 적도 없는데 그냥 물건만 먼저 왔습니다. 상자를 풀어보니 내용인즉 일단 팔고 돈은 나중에 받으러 오겠다는 것입니다. 팔다 남은 것은 반품도 받겠답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니 그렇게 온 카드만 20종이 넘었습니다. 서점 중간의 넓은 진열대를 비우고 카드를 깔아놓았습니다.

카드는 숨기기 좋아 손님이 고르고 있으면 지켜봐야 했습니다. 겨울방학이 되니 놀러 오는 학생이 많았습니다. 12월 중순쯤에는 카드를 사러 오는 손님이 많아졌습니다.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보면 사러 오는 사람인지 구경하러 오는 사람인지 대강 구별됐습니다. 많이 살 사람인지 훔치러 온 사람인지도 구별됐습니다.

방학에 마땅히 갈 데도 없고 한창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몰려다닙니다. 서점 방에는 우리 집 단골 학생들이 아침 일찍부터 와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남편과 둘이 가게를 보다가 손님이 많을 때면 학생들이 나와서 같이 팔아줬습니다. 학생들은 서점 일을 도와주는 대신 마음대로 책을 보고, 점심에는 짜장면을 시켜주면 아주 만족해했습니다. 수상한 학생들이 몰려오면 방에 있던 학생들이 쭉 나와서 지켜보고 카드를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유명하고 멋진 카드가 많았습니다. 정말 예쁘고 탐스러운 카드도 있었습니다. 무명의 작가가 수작업으로 만들었다는 카드가 가장 인기가 좋았습니다. 다른 카드들은 재고가 많이 남았는데 그 카드는 동이 났습니다. 다시 주문했는데 물건이 없다고 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오자 할 일 없는 학생들이 카드를 사러 돌아다녔습니다. 어느 가게고 떼 지어 들어가서 정신을 쏙 빼놓았습니다. 아닌 척하고 카드를 주머니에 넣고는 한 장 사는 것처럼 계산합니다. 주머니 속에 있는 카드도 계산하라고 하면 얼굴이 시뻘게져 어쩔 줄 몰라 하며 돈이 모자란다고 꺼내놓습니다. 어떤 학생은 울면서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니까 철모르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가방에 집어넣은 게 더 비싸요”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못 믿습니다. 어떤 중년 아줌마가 옷도 깨끗이 입고 차림이 아주 깔끔하고 신사 같았습니다. 조용한 시간에 와서 카드를 고릅니다. 열심히 고르다가 카드 열 장짜리 한 다발을 슬쩍 가방에 집어넣습니다. 한참을 고르다가 또 한 묶음을 가방에 슬쩍 집어넣었습니다. 세 묶음을 가방에 넣은 뒤 손에 카드 몇 장을 들고 계산해달라고 왔습니다. “아줌마, 이 카드보다 가방에 집어넣은 카드가 더 비싼 카드예요” 했더니 얼굴이 하얗게 굳어서 가방에서 카드를 꺼내 만지작거리며 이게 비싼 거냐고 했습니다. 한참을 만지작거리고 망설이더니 두 다발은 안 사고 한 다발만 사겠다고 했습니다.

팔릴 기미가 없던 연하장은 크리스마스가 지나자 며칠 동안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그러다 1월10일이 넘어가니 조용해졌습니다. 재고 정리를 여러 날 밤을 새워 했습니다. 남은 카드를 한쪽으로 밀어놓고 참고서나 문제집을 중간 진열대에 놓는 일도 해야 했습니다. 카드는 회사별로 분류하고, 또 가격별로 정리해야 했습니다. 낮에는 가게를 보고 밤을 새워 분류했습니다. 한 달 동안을 눈에 불을 켜고 카드를 팔고 지켜서 많이 잃어버리지 않고 꽤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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