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을 시작할 때 가게를 세 얻어 시작했습니다. 가게 월세를 낼 때 내 가게를 갖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내 가게를 갖고 남들처럼 이층집을 짓고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꿈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모은 돈을 제천 땅을 사는 데 다 썼기에 언제 다시 돈을 모아 집을 지을지 까마득했습니다.
우리 집을 중심으로 해서 위로 옆집은 평창상회 가정집으로 어른들이 계셔서 든든한 이웃이었습니다. 아래로 옆집은 나와 중학교 동창인 키가 큰 남자아이네 집인데 삼대독자였답니다. 일찍 장가가서 아들딸을 여덟 명이나 두었습니다. 동창댁은 튼튼하고 기운이 세서 시원스럽게 일을 잘했습니다. 그 집 할머니나 동창댁은 자기 집 아들뿐만 아니라 남의 집 아들도 좋아했습니다. 우리 아들은 그 집 막내아들과 친구입니다. 조금만 별난 음식이 있으면 서로 나눠 먹습니다. 남자들끼리는 뜨락에 앉아 바둑을 두고 가끔 낚시도 같이 다니는 아주 친한 사이로 지냈습니다.
우리 동창네는 집을 새로 짓지 않고 증축해서 산다고 합니다. 그 집은 가게 평수가 넓었습니다. 우리 집 쪽으로 가게 한 칸은 가건물이었습니다. 집을 증축하면서 가건물도 반듯한 가게로 짓기 위해 전면 기둥을 다 새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증축하면서 우리 땅으로 60㎝를 더 들어와 기둥을 세웠습니다. 그래야 자기네 가게가 반듯하게 나온다고 합니다. 전면 60㎝를 먹고 들어와 기둥을 세우면 뒤로 60m까지 우리 집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거의 열 평이 되는 면적입니다.
터를 닦을 때부터 그리 하지 말라 했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지금 놀고 있는 우리 땅에 임시로 지어서 살다가 정식 건물을 지을 때 돌려주겠답니다. “그럴 수는 없다. 자식 대까지 싸움 물려줄 일 있나. 지금 새로 측량하고 분명히 하자”고 했습니다. 군청에 두 필지 측량을 신청했습니다. 두 필지 측량비도 우리가 다 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측량하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측량하니 기둥을 세운 땅을 조금 지나서 여기까지가 경계라고 말뚝을 박아주고 갔습니다.
동창네 사람들이 아주 돌변했습니다. 그 집 남자는 끝까지 우리 땅에 세운 기둥을 뽑지 않으려고 새로 정식으로 집을 지을 때까지 사용료를 준다고 합니다. 여러 날 동안 사정을 했습니다. 끝내 안 된다고 하자 동창은 큰 키에 휘청휘청 우리 집 앞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기둥을 뽑나봐라. 절대로 나는 기둥을 안 뽑는다”고 소리쳤습니다.
날만 밝으면 길에 나서서 욕을 해대고일주일을 버텨도 안 되자 자기네도 할 수 없이 기둥을 뽑아 자기 땅으로 들여세우는 날 동창댁이 길길이 뛰면서 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까짓 꼴난 땅 몇 평 가지고 남 집 짓는 데 방해한다고, 기껏 돈 들여 세운 기둥을 기어코 뽑게 한답니다. 저것들을 갈아 마셔도 시원찮고 간을 꺼내서 잘근잘근 씹어 먹어도 분이 안 풀린다고 했습니다. 동창댁은 아주 이것들을 녹여버리겠다고 날만 밝으면 길에 나서서 갖은 욕을 합니다. 참다 참다 어느 날 마음 독하게 먹고 욕하는 동창댁 앞에 버티고 섰습니다. 내가 꼼짝 않고 여기 서 있을 테니 칼 가져와서 네 맘대로 해라, 못하면 너는 사람도 아니라고 소리쳤습니다.
아무리 욕해도 아무 말도 않던 내가 갑자기 소리쳤더니 동창댁은 아무 말도 못하고 들어갔습니다. 다음날 아침밥을 짓는데 동창댁이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들어왔습니다. 벜(부엌)으로 쑥 들어오더니 이년 칼이 어디 있나 찔러 죽이려고 왔답니다. 휘~ 둘러봐도 칼이 안 보이자 주먹을 휘두르며 점점 다가왔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웬만한 남자도 이겨먹는다고 소문난 사람입니다. 벜 구석으로 나를 몰아넣고 양팔을 꽉 잡는데 엄청 아팠습니다. 다행히도 떨어진 감자를 밟고 미끄러져서 나를 놓쳤습니다.
동창댁이 미끄러지는 틈을 타서 나는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야속하고 어이없는 이웃입니다. 집을 지으려고 마음먹을 때 우리가 먼저 집을 지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으로 세상살이란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들을 태권도장에 보내고 싶은데 그 집 친구가 하는 도장이고 그 집 아들도 다닙니다. 혹시나 아들을 해코지할까 태권도장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의지하고 살았던 큰오빠도 선행상 수기 모집에 대통령상을 받고 승진해서 춘천으로 이사했습니다. 큰오빠네가 없는 평창은 썰렁하고 왠지 나도 자꾸만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남편이 영월에 서적 총판을 내서 이사 가자고 했습니다. 무엇이든 결단력이 빠른 남편은 영월, 평창, 정선, 태백시까지 아우르는 서적 총판을 낸다고 했습니다. 마침 운영하던 학생사(가게 이름)도 맡고 싶어 하는 사람이 세 명이나 있어서 가게는 쉽게 넘기고 집은 세를 주고 떠나기로 했습니다.
1학년인 아들은 학교에 친구도 많고 학교생활이 재미있다며 떠나기 싫다고 했습니다. 1학년 엄마들도 우리가 이사 가는 것을 많이 섭섭해했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큰딸도 친구와 헤어지기 싫다고 했습니다. 아들 반 아이들이 모여 사진관에 가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어린 딸 둘도 같이 끼여 사진을 찍었습니다.
평창 온 지 7년 만에 떠나게 됐습니다. 그동안 많은 돈은 못 벌었지만 많은 추억과 사연을 쌓았습니다. 평창에 올 때는 아들 하나 데리고 왔는데 떠날 때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메추라기 새끼 같은 딸 둘을 얻어 다섯 식구가 됐습니다.
남편은 이삿짐 트럭을 타고 먼저 가고 저는 아들딸과 버스를 타고 영월로 이사합니다. ‘평창이여 안녕히 계십시오’ ‘영월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하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평창에 처음 왔을 때 어디 기댈 데 없이 난감했던 날들이 생각납니다. 터무니없이 동창댁한테 욕먹은 것에 억울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떠나는 것을 너무 섭섭해하시던 아버지 어머니를 두고 가는 것도 목이 멥니다. 참느라고 애쓸수록 눈물이 점점 더 나며 흑흑 소리가 납니다. 입을 틀어막을수록 엉엉 소리가 커지고 울면서 소나기재를 넘어갔습니다.
전순예 1945년생·<내가 사랑한 동물들> 저자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외신도 ‘윤석열 구속기소’ 긴급 보도…“한국 최악 정치 위기 촉발”
‘윤석열 친구’ 선관위 사무총장도 ‘부정 선거론’ 반박했다
“새해 벌 많이 받으세요”…국힘 외면하는 설 민심
내란의 밤, 불난 120·112…시민들 “전기 끊나” “피난 가야 하나”
“탄핵 어묵 먹고 가세요” 무너진 법치, 밥심으로 일으킨다
명절로 자리잡은 지 40년 안 된 ‘설날’…일제·독재에 맞선 수난 역사
윤석열 재판 최대 쟁점은 ‘그날의 지시’…수사 적법성도 다툴 듯
전도사 “빨갱이 잡으러 법원 침투”…‘전광훈 영향’ 광폭 수사
중국 개발 ‘가성비 최강’ AI 등장에…미국 빅테크 ‘패닉’
이재명 vs 국힘 대선주자 초박빙…박근혜 탄핵 때와 다른 판세,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