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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공간] 백석동천 별서의 주인은 누구인가

서울 종로구 부암동 ‘백사실 계곡’ 별서의 숨겨진 역사
등록 2021-06-13 01:12 수정 2021-06-19 11:18
백석동천의 정자(모정·백석정·간정료) 주춧돌과 연못(함벽지), 언덕 위의 별서 터 주춧돌의 모습.

백석동천의 정자(모정·백석정·간정료) 주춧돌과 연못(함벽지), 언덕 위의 별서 터 주춧돌의 모습.

“골짜기 물은 무슨 마음으로 밤새도록 흘렀나?

산꽃은 스스로 피었지만, 보는 사람이 적네

눈썹 사이에 한 줄기 연기와 노을이 비치니

열흘 동안 함께 놀아도 흥겨움 다하지 않네”

(허필, ‘북한산 남쪽 ‘백석 별업’(별서)에서 정윤, 강세황과 시를 짓다’, 1737년)

서울 종로구 부암동 백악산(북악산) 백사실(白沙室) 계곡, 또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의 별서(본집 외에 따로 지은 집) 터는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이 별서를 만들어 사용한 사람이 누구였나를 두고서 말이다.

이항복 소유설, 아무 근거 없다

많은 사람이 ‘백사실’이라는 이름 때문에 백사 이항복을 떠올렸다. 이항복은 여기서 멀지 않은 종로구 필운동 필운대에 살았다. 그러나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012년 10월 백사실 계곡의 별서가 이항복의 소유였다는 오랜 추정이 아무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그리고 “백사실의 본래 명칭이 백석실(白石室)이었다”고 밝혔다. ‘백석’이란 백악산과 마찬가지로 이 계곡의 화강암이 흰 것을 말함이고, ‘실’은 집을 뜻하는 한자(室)나 ‘골짜기’를 뜻하는 고유어로 해석됐다. 백사실은 백석실이 와전된 발음으로 추정됐다.

앞서 문화재청은 2005년 이곳을 ‘사적’(역사유산)으로 지정하면서 별서의 공식 이름을 여기 바위에 새겨진 대로 ‘백석동천’으로 결정했다. 백석동천에서 동천(洞天)은 ‘무릉도원’이나 ‘별천지’처럼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한다. 2008년엔 경관의 가치를 더 평가해 ‘명승’(자연유산)으로 변경했다.

여기가 백사 이항복의 별서가 아니었다면 그 주인은 누구였을까. 문화재청은 이 별서의 역대 주인 중 한 사람을 추사 김정희(1786~1856)라고 밝혔다. 김정희가 쓴 ‘금헌(친구 성진경)과 함께 종경릉(명나라 시인 종성)의 운을 잡다’라는 시가 근거였다. 김정희는 이 시에서 “구구한 문자에도 정령(영혼)이 있으니 선인(신선)이 살던 ‘백석정’을 예전에 샀다”고 썼다. 백석정은 백석동천의 정자 또는 별서 전체의 이름이다.

김정희는 이 시의 주석에서 “나의 ‘북쪽 별서’를 말한다. 백석정 옛터가 있다”고 썼다. 또 친구 김유근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아버지가 엊그제 잠깐 ‘북쪽 별서’로 나가셔서 며칠 동안 서늘한 바람을 쐬실 생각이었다”고 했다. 당시 이들 부자는 이 별서의 남쪽인 종로구 적선동 월성위궁에 살았다. 김정희가 백석정을 소유한 시기는 그가 월성위궁에 살았던 1793~1840년 사이로 보인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김정희 이전에 이 별서를 소유했던 ‘선인’은 밝히지 못했다. 다만 다른 글들을 인용해 애초 ‘허씨’가 이 별서를 소유했던 것으로 추정했다.

18세기 중반에 살았던 이광려(1720~1783)는 백석정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비 온 뒤 북한산으로부터 시냇물을 따라오다가 폭포를 봤다. 세검정으로 가려고 하다가 시냇물 위를 보니 높은 골의 가는 폭포(고간세폭) 한 줄기가 있었다. 그 위에 ‘허씨의 모정’(띠풀 정자)이 있었다. 편액을 ‘간정료’(솥을 보는 집)라고 했다. 시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이참봉집>) 여기서 ‘허씨의 모정’이 백석정으로 추정된다. 이광려가 지은 3편의 시에도 ‘허씨 정자’ ‘허씨 집’이란 표현이 나온다. 이 글에 묘사된 폭포는 지금도 백석동천 어귀 현통사 부근에 있다.

이 골짜기의 이름 ‘백석동천’이 새겨진 바위.

이 골짜기의 이름 ‘백석동천’이 새겨진 바위.

추사 김정희 전 주인은 허필?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1807~1877)가 1820년 지은 ‘석경루 여러 절경 시 20수’에도 백석정 이야기가 나온다. “석경루(백석정 아래 누각) 북쪽은 샘과 돌이 기이하고 그 위로 ‘백석정 옛터’가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허씨 진인(도인)이 살던 곳인데, 진인은 어느 때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이 글들을 통해 백석정의 옛 주인이 허씨였고 그가 도가 계열 사람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간정료’ ‘진인’ 같은 표현은 모두 도가적 표현이다. 간정은 약이나 차를 달이는 솥을 본다는 말이며, 진인은 도인·신선을 말한다.

허 진인의 유력한 후보는 2년 뒤 나타났다. 최종현 통의도시연구소장(한양대 전 교수)은 2014년 허 진인이 선비이자 시인, 화가였던 허필(1709~1761)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글 맨 앞에 인용한 1737년 ‘백석 별업’이라는 표현이 그 근거다. 그는 1749년엔 강세황 등 친구들과 백석동천 어귀 세검정에서 놀며 ‘세검정에서 봄놀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허필은 누구였을까. 그는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글, 글씨, 그림을 즐긴 사람이었다. 그는 강세황(1713~1791)의 친구로 함께 산수화를 그렸고 강세황의 그림에 평을 썼다. 두 사람은 도성 안 남산 자락에서 이웃으로 살았다.

이광려는 ‘표암 강광지(강세황)에게 드리다’라는 시에서 두 사람을 이렇게 말했다. “표옹(강세황)과는 서로 늦게 알았고, 연옹(허필)과는 끝내 인연이 없었다. (…) 여럿한테서 들으니 허 선생은, 사람 중에 진짜 자유로운 선인(禪人)이라네.” 허필의 호는 연객(담배 피우는 사람), 또는 연옹(담배 피우는 늙은이)이었다. 골초였던 모양이다. 이광려의 시들을 종합해보면 그는 허필이 백석동천 별서의 주인임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문화재청 연구를 맡았던 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 교수는 “백석동천 별서는 도성과 가깝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가진 곳이다. 특히 도가 계열과 관련이 깊어서 무예를 닦는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조성자와 소유자 정리 중”

최종현 소장은 “부암동 일대의 별서는 안평대군의 무계정사로부터 시작했고, 탕춘대를 지은 연산군이 쫓겨난 뒤 폐허가 됐다. 숙종 때 이 일대에 북한산성을 지은 뒤 백석정과 석파정(옛 삼계정), 윤웅렬 별서가 잇따라 들어섰다”고 말했다.

황권순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장은 “백석동천 별서는 2012년 확인한 김정희 외에도 허필이나 홍우길 등이 소유자였다는 의견이 나왔다. 현재 여러 자료를 검토해서 조성자와 역대 소유자를 정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최영성, ‘‘백사실’ 별서에 대한 고찰-추사 김정희와 관련성을 중심으로’, 2013
최종현, ‘백석정 별서 유적 및 백석동천 연원에 관한 연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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