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역사 속 공간] 안평, 세종 시대의 꿈과 낭만을 그리다

조선 풍경화 걸작 안견의 <몽유도원도>… 수양과 안평의 엇갈린 ‘길’은 비극으로
등록 2021-04-05 15:44 수정 2021-04-12 10:34
안견이 안평대군 이용의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 왼쪽 글씨가 안평이 쓴 ‘도원기’의 일부다. 일본 덴리대학 소장

안견이 안평대군 이용의 꿈을 그린 <몽유도원도>. 왼쪽 글씨가 안평이 쓴 ‘도원기’의 일부다. 일본 덴리대학 소장

“1447년 4월20일 밤 잠자리에 들었더니 정신이 아른거려 나는 곧 깊은 잠에 떨어지며 꿈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갑자기 나는 박팽년과 어느 산 아래 도착했다. 산봉우리는 겹겹이 있고 깊은 계곡은 그윽했다. 복숭아꽃이 핀 나무 수십 그루가 늘어선 사이로 오솔길이 있었다. (…) 그때 몇 사람이 뒤따라왔으니 바로 최항과 신숙주였다. (…) 나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여럿인데 어찌 두세 사람만 동행해 도원에서 놀았던가. (…) 이들 몇 사람과 사귀는 도리가 두터워 함께 여기에 이른 듯하다. 이제 안견에게 말해 그림을 그리게 했다. (…) 나중에 이 그림을 보는 사람이 옛 그림을 구해 내 꿈과 비교해본다면 반드시 무슨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꿈꾼 지 사흘 만에 그림이 완성돼 비해당의 매죽헌에서 이 글을 쓴다.”

-안평대군 이용 ‘도원기’

‘시서화 삼절’, 조선 최초·최대 수집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조선 풍경화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29살이던 안평대군 이용(1418~1453, 안평)은 이 그림을 그리게 한 이유를 ‘도원기’에 자세히 써놓았다. 이 그림이 완성된 뒤 안평은 자신을 비롯해 22명한테서 글을 받아 이 그림에 붙였다. 이 꿈에 동행한 박팽년, 최항, 신숙주는 물론이고 김종서, 성삼문, 이개, 정인지, 서거정, 박연, 이현로 등 당대 최고의 대신과 문인이 망라됐다. 그래서 <몽유도원도>의 세로 길이는 41㎝지만, 가로는 17m58㎝에 이른다. 

이 그림은 조선의 절정기였던 세종 때의 문화적 역량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1447년은 세종이 한글을 발표한 지 1년 뒤, 세상을 뜨기 3년 전이다. 세종의 주요 업적이 모두 완성됐고 ‘태평성대’라는 말 그대로였다. 이 그림은 이 시대의 꿈과 낭만을 보여준다. 

세종 이도의 셋째 아들 안평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안평은 당대에 ‘시서화 삼절’(글·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난 사람)로 평가됐다. 한마디로 천재였다. 글씨는 조선 전기 4대 명필로 꼽혀 활자, 교과서로도 만들어졌다. 또 뛰어난 시인이었고 <당송팔가시선> 등 여러 시집의 편집자였다. 그림에도 뛰어났고 <소상팔경시권> 등 시서화집을 편집하기도 했다. 

더욱이 안평은 조선 최초, 최대의 수집가였다. 신숙주가 쓴 ‘화기’(그림기록)를 보면, 이용은 27살 때인 1445년 자신의 집 비해당에서 중국 동진과 당, 송, 원, 조선, 일본의 화가와 명필가 35명의 작품 222점을 신숙주에게 보여줬다. 여기엔 고개지, 왕유, 소동파, 조맹부 등 전설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이 포함됐다. 당시 안평은 책도 1만 권이나 소장하고 있었다. 

안평을 이렇게 뛰어난 문화예술계의 리더로 만든 사람은 아버지 세종이었다. 세종은 한 살 터울인 수양대군 이유(1417년생)와 안평대군 이용(1418년생)을 성균관에 보내 또래들인 박팽년(1417년생), 신숙주(1417년생), 이개(1417년생), 성삼문(1418년생) 등과 함께 공부하며 성장하게 했다. 이 형제와 친구들이 협력했다면 조선의 전성기는 좀더 길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안평과 수양 모두에게 ‘충성’의 이름을 내렸지만

세종은 왕자들에게 왕실의 일뿐 아니라 정부나 문화예술, 종교 업무를 광범위하게 맡겼다. 이로 인해 수양과 안평은 정치적으로도 성장하는데, 이것이 나중에 비극의 불씨가 된다.

세종은 이런 점을 우려해 재능이 뛰어난 두 왕자를 각별히 단속했다. 재능이 더 뛰어났던 안평에겐 1442년 집이름(당호) ‘비해당’을 내렸다. 비해당에서 ‘비해’(匪懈)는 <시경> ‘증민지시’의 ‘밤낮으로 게으름 없이 한 사람을 섬긴다’는 문장에서 뽑은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세자인 큰형 이향(문종)에게 충성하라는 뜻이었다.

수양에 대해서는 대군 작호로 단속했다. 애초 수양의 작호는 진평이었다가 함평, 진양으로 바뀌었는데 1445년 ‘수양’이란 작호를 새로 내렸다. 수양은 백이와 숙제가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었다는 ‘수양산’에서 나왔다. ‘비해’와 마찬가지로 ‘수양’도 큰형 이향에게 충성을 다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두 형제의 길은 엇갈렸다. 안평은 문종이 즉위한 해인 1450년 3년 전 꿈에서 본 ‘도원’의 모습을 창의문 밖 인왕산 자락에서 발견했다. 1451년 이곳에 ‘무계정사’라는 별장을 지어 박팽년과 성삼문, 이개, 서거정 등과 어울렸다. ‘무계’는 무릉도원 계곡, ‘정사’는 도 닦는 집을 뜻한다. 반면 수양은 이 시절에 명문가 출신이지만 출세하지 못했던 한명회, 권람 등과 어울렸다. 1452년 문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한명회 등은 수양에게 안평을 먼저 치라고 권유했다.

결국 수양은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어이없게도 안평이 김종서 등과 단종에 대한 반란을 꾀했다는 이유였다. 안평은 사약을 받았고 김종서·황보인 등 100여 명이 살해, 처형됐다. 1456년 사육신, 1457년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은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했다. 단종과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았고, 안평의 친구 박팽년·성삼문·이개 등 수백 명이 처형됐다.

안평이 소장했던 수많은 글과 글씨, 그림은 모두 불태워졌다. 1453년 10월25일 <조선왕조실록>은 ‘그때 이용과 (측근) 이현로의 집에 괴상하고 신비한 글이 많았는데, 세조가 보지도 않고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적었다.

안평대군 이용이 ‘도원’을 꿈꾼 집 비해당이 있던 인왕산 수성동(물소릿골) 모습. 왼쪽 아래 돌다리는 기린교이고 오른쪽 위 봉우리는 인왕산 정상이다.김규원 선임기자

안평대군 이용이 ‘도원’을 꿈꾼 집 비해당이 있던 인왕산 수성동(물소릿골) 모습. 왼쪽 아래 돌다리는 기린교이고 오른쪽 위 봉우리는 인왕산 정상이다.김규원 선임기자

1950년 한국으로 찾아올 기회 못 잡고

그러나 440년 뒤 <몽유도원도>는 1893년 일본 사쓰마번(현재의 가고시마현)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사쓰마 영주인 시마즈 요시히로가 임진왜란 때 약탈한 것으로 추정됐다. 이 그림은 현재 일본 덴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1950년 덴리대학에 넘어가기 전, 한국 정부가 구입할 기회도 있었다. 안타깝게도 가격이 너무 비싸 거래가 이뤄지지 못했다.

안평이 ‘도원’의 꿈을 꾼 비해당은 현재의 서울 종로구 옥인동 수성동 계곡 일대에 있었다. 그가 꿈에서 본 ‘도원’을 발견하고 지었다는 무계정사는 종로구 부암동에 있었다. 20세기에 소설가 현진건의 집이 들어섰다가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다. 그가 친구들과 잔치를 벌인 담담정은 현재의 용산구 청암동 언덕 위에 있었다. 안평의 친구였으나 수양에게 가버린 신숙주가 담담정을 차지했다.

김규원 선임기자 che@hani.co.kr

참고 문헌
김경임,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산처럼, 2013
심경호, <안평>, 알마, 2018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