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말에 읽을 책을 고르기 위해 책꽂이 앞에 갔다가 시선이 맨 위로 올라갔다. 구석에 위태롭게 꽂힌 두꺼운 앨범들. 아주 오랜만에 어릴 적 사진이 담긴 앨범을 꺼내서 봤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거의 한 번도 앨범을 펼쳐보지 않았다. 앨범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사진들을 보면 얼마나 재미있을지도 알고 있었다. 책꽂이 높은 선반에 있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앨범은 어쩐지 꺼내기 어려운 마음이 든다. ‘김장하는 날’ ‘대청소하는 날’처럼 ‘앨범 정리하는 날’을 따로 잡아 조금 들여다봐야 할 것만 같다.
2011년 태어난 남동생의 사진은 거의 다 스마트폰 사진으로 찍어 컴퓨터에 저장됐다. 종이 사진 앨범에는 나와 언니의 어릴 적 사진이 대부분이다. 갓난아기일 때는 거의 분초 단위로 찍은 듯한 사진이 많지만, 주로 새로운 장소에 놀러 갔을 때 특별한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남긴 사진이 많다. 어떻게 찍혔는지 기억나지 않는 사진도 있다. 또 어떤 사진은 그때 사진기를 든 아빠의 표정,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은 내 손, 곁에 있는 언니의 말이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한다. 혀끝에는 그날 공기의 맛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더운 여름날 해변에서 짭짤한 습기. 겨울 장작불 앞에서 맡은, 콧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탄내. 한 장의 사진이, 더 정확히는 그 사진이 불러온 어느 날의 기억 단편이 나를 오랫동안 붙잡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진은 눈이 거의 사라질 지경으로 접어 올리고 눈 밑에는 선처럼 생긴 보조개를 띄운 채 얼굴을 우글우글하게 하여 웃는 내 모습이다.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자주색 코르덴 원피스를 입고 대체 뭘 보고 있는지, 누가 간지럽히기라도 했는지 손은 TV 프로그램에 나온 방청객처럼 물개박수를 치고 있다. 나에게 이런 표정도 있었나, 내가 이렇게 웃나 하며 따라 웃고 싶어지는 사진. 나는 일상적으로 이렇게 잘 웃었다. 웃는 모습으로도 웃음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앨범 사진을 보는 일은 오랜만이지만 과거를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친구들도, 나도 가끔 소셜미디어에 옛날 사진을 올린다. 최근에는 주로 과거에 내가 자랑스러웠다고 느꼈던 순간의 감정이 좋아서 사진을 올릴 때가 많았다. 등산 가서 산꼭대기임을 알리는 바위 앞에 뿌듯하게 서 있는 사진이라거나, 오랜 시간 게으르게 연습해서 결국 완성했던 피아노곡을 치는 영상 등이다. 어렵고 반복되는 시간을 이겨낸 나에게서 격려를 얻으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잘 봐, 저게 어려운 순간을 이겨낸 네가 겪을 수 있는 기쁨이야, 지금은 어쩌면 좀더 단단해지기 위해 단련하는 시간인 거라고, 이 시간에 대한 보상이 언젠가 나를 환하게 빛내줄 거라고 생각했다.
병은, 병이 가져온 고통은 내가 이루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한 인고의 시간이 아니다. 이 고통을 ‘이겨낸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언제 끝난다는 보장도 없고, 끝나면 내가 이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병마와 싸워 이기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병에 의한 고통과 싸우지 않고 그냥 아픈 순간은 아프도록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걸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은 특별히 여행 갔거나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 있었을 때 찍힌 사진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그랬다면 어떤 연유로 그렇게 즐거웠는지 기억에 남았을 거다. 일상에서도 그렇게 웃긴 표정으로 웃을 수 있다면, 그 순간의 사진을 보면서 또 재미있게 보낼 수 있다면 충분한 것 아닐까. 나는 병과 함께 살고 있다. ‘병에 걸렸음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병이 망칠 수 없는 내 일상의 웃음이 있음을 알아두려는 것이다.
신채윤 고1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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