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마지막 날 저녁, 긴 고민 끝에 반려식물을 입양했다. 오래전부터 내 방에서 반려생물을 기르는 것에 로망이 있었다. 동물을 키우고 싶었지만 언니에게 알레르기가 있었고, 엄마가 “우리 집에는 이미 식구가 많다”고 선을 그었다. 식물을 기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2018년 말 내 방이 따로 생긴 뒤, 줄곧 어느 화분을 놓을까 상상했다. 기왕이면 작고 너무 무겁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가 서랍장 위에 올려놓고 기르면 괜찮을 것 같다, 화분은 하얀색이었으면 좋겠다, 화분 받침도 하나 있어야겠다…. 하지만 내 방은 북향이라 햇볕이 잘 들지 않는다. 일출도 일몰도 보이지 않고 낮에도 불을 켜야 한다.
식물을 기르기에 완벽한 환경이라고는 할 수 없다. 특히 내가 기르고 싶은 건 햇볕 잘 들고 바람 잘 통하고 건조한 환경에서 길러야 한다는 이파리 통통한 다육식물이었다. 인터넷에서 가볍게 검색해보고 내 방은 안 되겠다며 포기한 이후, 늘 키우고 싶다고 생각만 할 뿐 깊게 알아보진 않았다. 그러기엔 내 몸 하나 건사하는 것도 벅찼고 남는 시간에 할 일도 많았다. 나는 로망을 실현하는 일에 게을렀다.
10월에는 권태롭고, 지루하고, 상투적인 순간이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병에 걸린 뒤 상황은 차츰 나아졌지만 그 속도는 보이지 않을 만큼 느렸다. 무언가 잔뜩 하고 싶다는 내 생각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병에 걸려서 움직이는 일을 망설인 뒤 많은 걸 미뤘다. 등산이나 검도·킥복싱 같은 운동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마다, 좀 괜찮아지면 하고 넘어갔다. 약을 먹어서 몸이 붓자 예쁜 옷을 사는 것, 미용실에 가서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시도하는 것, 액세서리를 고르는 것을 미뤘다. 사소하게는, 시험 기간이라서 그림 그리고 뒹굴뒹굴하는 것을 미뤄야 했다.
미루는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결심한 만큼 행동하고, 행동한 만큼 뭐라도 바뀌는 걸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고민은 길었지만 화분을 사러 가겠다는 결정은 다분히 즉흥적이었다. 엄마, 아빠, 남동생과 함께 다육식물을 파는 화훼단지 내 하우스에 가서 설명을 들었다. 그늘에서도 잘 기를 수 있다는 초록색 다육식물을 손에 들고, 컴컴한 차창 밖을 바라보며 집에 돌아왔다.
그날부터 내 방에서 내가 울고 웃고 일기 쓰고 그림 그리고 책 읽는 모습 등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는 다육식물은, 금영화와 외래종을 교배한 금영군생이란 종이다. 다육식물을 고르러 갔을 때, 반려생물을 키우려 할 때 한눈에 반하는 문학적인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며 약간 긴장했다. 하지만 고르는 과정은 생각보다 느리고 현실적이었다. 채광이 좋지 않은 방에서 기를 거니까 화려한 색은 피하고 혼자 심긴 다육은 외로워 보이니까 군생으로 고르자.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만큼 엄격한 선발 기준에 따라 여러 선택지를 점차 줄이니 한 그루만 남았다. 아, 너구나. 내가 정을 붙이고 기를 생물이.
아직 이름을 붙여줄 만큼 친밀한 사이는 아니라서 금영군생 화분에는 마땅한 호칭이 없다. 내 방의 화분, 하얀 화분 정도로 적당히 부른다. 서로 천천히 알아가기로 했다. 짙고 약간 탁한 초록색에 위쪽이 조금 갈라진, 엄지손톱만 한 통통한 몸통 여러 개가 옹기종기 모인 모습이 퍽 사랑스럽다. 이파리 위쪽 작게 난 흠집마저 사랑할 각오로 모셔온 화분이다. 가족을 들인다는 건 그런 일이니까. 내가 없을 때도 있을 때도 한결같이 자리를 지킬 내 화분은, 매일 아침 혼자 있어도 불안하지 않을 만큼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외로움을 많이 타는 나를 위해, 내가 준비한 ‘믿을 구석’이다.
신채윤 고1 학생
*‘노랑클로버’는 희귀병 ‘다카야스동맥염’을 앓고 있는 학생의 투병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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