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이 지나가면 고개 돌려 보듯이 어여쁜 장정의 책은 열어보지 않을 수 없다. 중절모에 파이프 담배를 물고 주머니에 두 손을 넣은 퉁퉁한 남자가 한구석에 조그맣게 들어 있고 중앙에는 작품의 상징이 되는 물건 한두 개가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표지를 넘기면 센강은 하늘색, 뤽상부르공원은 연두색, 오래된 건물들은 적갈색으로 그려진 프랑스 파리 시내 지도가 있다. 파리 경찰청은 화살표로 표시했다. 개선문까지는 이 길로 가면 되는구나. 에펠탑은 이렇게 머네를 알 수 있는 자세한 지도다. 사건을 상상하는 실마리와 장소 안내가 표지에 다 있다. 아주 멋지다.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시리즈. 프랑스의 사랑받는 서민 경찰 매그레를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다. 이 어여쁜 시리즈를 도서관에서 발견하고 19권이 전부라 안도했다. 읽느라 일에 지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2017년에 나온 시리즈의 20번째, 21번째 책 <매그레와 벤치의 사나이>(1953), <마제스틱 호텔의 지하>(1942)는 신데렐라의 못된 의붓언니처럼 배신의 디자인을 보였다. 이전 시리즈의 표지를 완전히 뒤집었다. 이전의 흑백을 뒤집어 현상된 필름처럼 검은 바탕에 실물 같은 구두나 건물 모습이다. 하느님 맙소사. 새로운 시도는 골수팬들에겐 칭찬받기 어려운 법이다. 새로 내서 낯선 것이라고 위로한다. 이 시리즈도 20여 권 나란히 세운다면 멋있을 수도 있지 않겠나. 계속 내시라. 하지만 두 권 이후 감감무소식이다.
심농의 소설들은 먼저 줄거리를 읽고 그다음 20세기 초중반 파리를 읽는다. 비스트로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점심은 브라스리 도핀에 배달을 시킨다. 형사들이 점심 전 아페리티프(식전주)를 들고 매그레는 맥주를 마신다. 점심으로 보르도 반병은 낯설지 않다. 물 탄 브랜디(과실을 발효한 것을 증류한 술)도 좋다. 칼바도스(사과를 원료로 만든 브랜디)로 하루를 시작한 김에 카운터에서 한 잔 더 마시고 장례식에 다녀온 비 오는 날에는 그로그(럼주 또는 브랜디에 설탕, 레몬, 뜨거운 물을 섞은 것)를 두 잔이나 마신다. 비 오는 날 파전에 막걸리인 셈이다.
<매그레와 벤치의 사나이> 표지를 열고 책을 읽는다. 오십이 다 된 남자가 막다른 길에서 칼에 맞아 즉사했다. 이 남자는 3년 전 실직했지만 아내에게는 비밀로 하고 날마다 출근한다며 집을 나섰다. 아내는 남자가 신고 있는 누런 구두와 빨간 넥타이가 남편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실 매그레도 여러 해 동안 누런 구두를 신고 싶었다. 주머니 두둑할 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샀는데 아내가 킥킥 웃었다. 결국 그 구두는 발에 잘 맞지 않는다면서 물렀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취객끼리의 칼부림이었을 사건은 구두와 넥타이를 단서로 20년간 한 직장에서 일하다 실직한 남자의 미스터리가 된다.
내가 겪은 파리가 생각난다. 다양한 피부색에 편안했고 길거리에 개똥이 너무 많아 바닥만 보고 걸었다. 개미굴처럼 이어진 좁은 지하철과 네모 아이스께끼처럼 정돈된 나무들이 인상적이었다. 뤽상부르공원을 가는 깊은 지하철역에서 나를 둘러싸고 가방을 열려던 소매치기들은 잘 있나 모르겠다. 여행을 할 수 없는 시기, 소설은 공간 이동으로 그만이다.
최영화 아주대 감염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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