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꽂이엔 정해렴 편역의 <성호사설정선> 상·중·하와 박석무·정해렴 편역의 <다산문학선집> <역주 흠흠신서> <다산서간정선> <다산시정선>이 있고 정해렴 역주의 <아방강역고> <아언각비·이담속찬>이 있다. 내친김에 말하자면 <마과회통>도 있다.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할 것을 알았지만 만들어진 내력을 알기에 사서 보고 싶었다. 누군가의 공력을 눈으로 보는 기쁨이 있는 법이다. 책마다 인명·서명 해설이 달렸고 색인도 빠지지 않았다. 다산의 책에는 원문(교주본)도 실려 있다. 문맹의 내겐 눈이 어지러운 한자지만 글로 보이는 사람은 천근 무게로 오는 감동일 것이다.
<편집·교정 반세기>는 정해렴 선생의 자서전이다. 학창 시절 이야기로 시작해서 교학도서, 신구문화사, 을유문화사를 거치며 편집의 길로 들어섰고 창작과비평사에 몸담았다. 1980년대 창비의 대표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함께했고, 1995년 55살에 원하지 않던 정년퇴직을 했다. 이후 현대실학사를 만들고 현실총서를 간행했다. 앞서 말한 책들은 현실총서의 일부분이다. 내게는 눈에 익은 1980년대 스타일의 작은 글씨와 촘촘함이 학술서로 느껴지는데 사람들이 많이 읽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많이 팔리기를 기대하며 만드는 책이 있고 팔리지 않을 것을 알아도 만들어야 하는 책이 있다. 현실총서는 후자다.
<편집·교정 반세기>는 지은이는 팔릴 만한 책이 아니라고 했지만 나는 팔리지 않아도 만들어야 하는 책이었고, 잘 팔렸을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 출판의 역사와 한국문학의 줄기를 편집인의 눈을 빌려 개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작은 이점이다. 요즘 보기 힘든 담담하고 간결하며 정직하고 명료한 문체가 좋다. 쉽고 감동적이다. 감상이나 인용이 없다. 50년의 인생을 쓰는데 누구의 말이나 어느 위인의 언행으로 꾸밀 게 없는 충만함이란 이런 것인가 싶다. 또한 편집·교정의 자세, 정본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있다.
<격몽요결>을 교정하면서 문장 중에 ‘복’(復)이라는 글자가 나오는데 이 글자를 한자의 뜻대로 해석하려다보니 잘 통하지 않았다. 사전을 찾아 초혼할 때 ‘복 복 복’ 부르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문장을 바로잡았다. 대가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알았다 하신다. 한문 원문은 한 글자 한 글자 대조해 교정을 보았다. 본인이 교정 본 <시경>과 <서경>은 지금도 책상 좌우에 놓고 그 경서를 인용한 원문이나 해석이 나올 때마다 펼쳐서 대조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본인이 교정 본 책은 틀림이 없다. 대조하고 나서도 원문에서 고친 글자를 번역문을 찾아 확인해보고 번역문과 원문의 면수를 확인하고 체제를 살펴봤다. 통째로 빠지기도 하니까. 시들의 원근거를 찾는 한편 잘못된 곳을 고쳤다. 연재된 시들을 찾아내 연재순으로 바로잡았다. 원본을 두세 번씩 대조해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발표 원전을 복사해 참고하며 결정본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드디어 ‘정본’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현실총서 이후에도 건강이 허락한다면 편찬할 책의 목록이 있다. 한국고전소설선집, 한국인명대사전, 고전소설사전, 동주열국지. 한국고전소설선집은 이미 16권에 정리했다 하셨는데 출간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사라지는 것들의 목록에 무엇이 있을까? 정해렴 선생님이 창비에서 한 마지막 작업 <역주 백호전집>은 당신밖에 할 사람이 없어 편집·교정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하셨다. 우리 문화유산을 정리해 후대에 물려줘야겠다는 선생님의 일념은 이어질 수 있을까? 그래서 결국 책을 덮으며 현대실학사의 책 10여 권을 샀다. <성호사설정선>은 수필집으로 읽고 <마과회통>에서 종두법을 읽을 것이다. 현대의 언어로 옮겨지지 않거나 옮겨졌어도 다시 읽히지 않음이 무상하다. 이 책은 2016년 12월 한국출판평론상 대상을 받았다.
아주대 감염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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