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생제의 길잡이>는 1983년 감염학회 원로교수이신 정희영 선생님이 쓰신 항생제 소개 책이다. 1983년 간행된 책은 보지 못했고, 내가 가진 책은 1990년 발행본이다. 500쪽 두께인데 바닷빛 옛글씨체에 금박으로 제목을 박았다. 스승님 책꽂이에서 어깨너머로 보았을 때 꼭 가지고 싶었는데 ‘길잡이’라는 한글 제목에 끌렸을 것이다. 결국 1998년 감염학회 이름으로 개정판을 내는 작업에 간사로 참여하면서 책을 얻었다.
책 첫머리는 ‘환자를 앞에 두고 어떤 항생제를 사용할 것인지를 생각한다’이다. 감동이 뭉게구름처럼 솟아났다. 이심전심, 나와 같은 고민을 한 선생님으로부터 길잡이를 안내받는 것에 대한 감동이었다. 조곤조곤한 글쓰기도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가. 2000년 개정판은 내가 다음으로 좋아하는 판본이다. 오탈자를 찾기 위해 여러 번 읽었고, 화학식의 탄소 숫자와 구조식의 연결선을 틀리지 않으려고 참고 문헌을 뒤졌으며, 글의 통일성을 위해 교정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여러 학교 교수들이 합숙하며 확인 작업을 한 정겨운 노고도 숨어 있다. 과거의 이런 시간 소모적인 교정 작업이 흐뭇한 것은 오탈자를 찾았을 때의 즐거움, 틀린 선이나 연도를 제대로 했을 때의 쾌감, 인쇄된 교과서에 틀린 내용이 없다는 만족감 때문이겠다. 교정이 성격에 맞나보다.
<뉴욕은 교열 중>이란 책은 신뢰받는 잡지 <뉴요커>에서 이름도 명쾌한 ‘오케이어’라는 직업을 가진 메리 노리스의 글이다. 작가의 글을 교정하는 일이니 관심이 갔고 많은 것을 얻었다. 자신의 직업은 문법, 구두법, 어법, 외국어와 문학에 관한 지식뿐만 아니라 갖가지 삶의 경험도 소용된다는 점에서 전인적이란다.
영어에는 person, anyone, everyone, no one 같은 양성 일반 단어는 많은데 양성 단수 인칭대명사는 없다. he, she, it이 있을 뿐이다. 성전환을 해서 여성이 된 남동생과 벌인 ‘대명사 전쟁’에는 그런 고민이 담겨 있다. he와 she를 동시에 담을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인가? 평생 써오던 습관으로 남동생에게 he라는 인칭대명사를 썼는데 그 호칭으로 동생은 상처받는다. 성전환을 했으니 she라고 했어야 한다. 외양이 어떻든 영혼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정체성을 결정한다. he 또는 she라고 시작해야 하는 영어가 고민스럽다.
영어 단어에 대한 공포와 문법이 틀리지 않는 문장을 써야 한다는 강박과 언제 생겼는지 모르는 영어 열등감이 이 책을 읽고 가벼워졌다. between you and me라고 할 때 상당수 미국인도 between you and I라고 문법으로는 틀린 문장을 쓴다. 하물며 내가 좀 틀리는 것쯤이야.
사전 편찬자 노아 웹스터는 알파벳 중 몇몇 글자의 이름을 바꾸고 싶어 했다. h는 히, w는 위, y는 이이로 불러야 더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웹스터는 철자법이란 올바른 발음을 찾기 위해 단어를 적절하게 분할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의 제트(z)가 미국에서 지(z)로 변한 것은 웹스터의 영향이다. 발음에 따라 정자법을 교정하고 성공하기도 한다. 영국의 감옥 gaol은 미국에서 jail이 되었다. 그렇지만 혀를 뜻하는 tongue을 tung으로 쓰자고 했지만 실패했다. musick와 traffick에서는 끝의 k를 떼어냈다. 올바른 발음을 생각하면 k는 없어도 된다고 대중이 인정한 것이다. 영어 단어도 변한다. 관계대명사 that과 which 중 하나를 골라 써야 하는 문제는 늘 발생하는데 이는 해석의 문제다. 영문법, 그들도 혼란스러운데 뭐가 그리 무서우랴. 오케이어가 나를 용감하게 한다.
최영화 아주대 감염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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