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인공호흡기’는 나만 어려운 게 아니었구나

인공호흡기 그래프를 해석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책
등록 2021-05-17 02:21 수정 2021-05-21 10:05
William Owens, MD 지음, 박명재 옮김, 군자출판사, 2021년 1월

William Owens, MD 지음, 박명재 옮김, 군자출판사, 2021년 1월

영어책을 번역해 한글판이라고 하면서 한글 제목을 붙이지 않은 예의 없는 책이다. ‘Ventilator’는 인공호흡기란 뜻이다. 책 뒤표지에는 중환자실을 ‘종환자실’이라고 당당히 틀린 글자로 남겨두었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이 고맙다. 같은 이름의 책이 미국 아마존에서 제일 잘 팔리는 호흡기 분야 책이란다. 초판이 2012년, 개정판이 2018년 나왔는데 2020년 3월 미국에서 연수 중이던 역자의 눈에 띄어 한글판이 나왔다.

옮긴이는 미국 뉴욕에서 코로나19 환자가 많아지면서 중환자가 늘고 인공호흡기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사도 부족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인공호흡기 사용 경험이 부족해 책을 보며 치료한다는 소식에 이 책을 번역해볼 생각이 났다고 한다. 옮긴이는 호흡기내과 전문의로 중환자실 경험이 있다.

인공호흡기는 일반 의사들도 두려워하는 기계다. 기도에 관을 넣고 인공호흡기를 시작하면 대개의 의사는 중환자 치료과에 환자를 보내고 싶어 한다. 환자 호흡을 대신해 기관지에 관을 넣고 기계로 폐에 공기를 불어 넣어주는 훌륭한 생존도구인데 다들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그 기계는 여러 그래프를 보여주고 판단하라고 의사에게 지시하며 해결해줄 때까지 번쩍번쩍 빨간불을 밝히고 소리도 삑삑 울린다. 알람을 해결 못하면 환자가 나빠질까봐 조바심이 난다. 동료들이 ‘몇 번 환자 알람 울린다. 왜 그래?’라고 물으면 답도 해야 한다. 알람이 해결돼 소리도 불도 꺼지면 언제까지든 명령대로 쉭쉭 공기를 밀어넣는 엄격한 상자, 인공호흡기. 호흡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래프는 ‘어린 왕자’가 내민 그림과 비슷하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이 연이어 나타나는 게 호흡기에서 보여주는 선이다. 그 곡선의 의미는 학생 때부터 정말 어려웠다. 그런데 나한테만 어려운 것은 아니었나보다.

지은이는 “기계환기 때문에 두렵고 겁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기계환기에만 쓰이는 용어가 있고 이해하기 어려운데다 또 생명유지 기술인 기계환기가 잘못되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환자 전문의는 인공호흡기 작동법을 난해하게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매우 똑똑한 전공의나 의대생도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이 말에 웃음이 났다. 정말 어려운 수업이었지. 지은이는 200쪽 남짓한 이 책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안내서로 읽을 가치가 있다고 자부했는데 전적으로 동감한다.

인공호흡기 초기 설정, 신속하게 조정해야 할 것들, 급성 호흡부전의 이해, 일자무식의 동맥혈가스 분석 등 읽을 가치가 있다. 기계환기의 11계명도 있다. 환자 폐의 유순도를 측정하라, 너무 고생시키지 말고 기도 삽관을 결심하라, 기계환기는 치료가 아니고 보조에 불과하다, 다양한 방법에 익숙해져라, 일회 호흡량을 적게 하라, 폐포가 열려 있게 하고 동맥혈가스 정상 소견을 추구하지 말라(88~95%면 만족), 호흡근을 피로하게 하지 말고 교활한 동적과팽창(autoPEEP)을 찾아내라, 매일 자발호흡시험을 하라, 마지막으로 호흡기 치료자를 존중하라.

번역에 참고한 원저의 2판은 2018년 출간됐다. 코로나19 유행 전에 나왔다. 그래서 한글판에 실린 감염병 대유행시에 유용할 ‘대유행과 다수 사상자 발생시 기계환기’ 내용은 원래 없었다. 번역판에 실린 건 이후 발간될 다른 책에 실릴 내용이었다고 한다. 지은이는 코로나19 상황 때문에 미리 내용을 공개하고, 중환자를 위해서라면 누구에게든 이 문서를 복사하고 배포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사정을 거쳐, 한국의 내가 코로나19 중환자실에서 그의 안내에 따라 표준화된 기계환기를 새롭게 익혔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중환자실이 있었다. 코로나19 이후 이전 중환자실 환자에 코로나19 중환자가 더해졌다. 코로나19 감염인 중 5%가 중증으로 진행된다. 이 환자들을 위해 새로운 인력이 더해져야 했다. 거기에 내가 있다. 땡규 닥터 오언스, 땡큐 박명재 교수님.

최영화 아주대 감염내과 교수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