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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는 비처럼 우박처럼

감염병과 공생해온 인류의 역사 <사피엔스와 바이러스의 공생>
등록 2020-12-21 18:32 수정 2020-12-22 00:02
사피엔스와 바이러스의 공생 야마모토 타로 지음, 한승동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

사피엔스와 바이러스의 공생 야마모토 타로 지음, 한승동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

교과서에 한 줄로 정리된 역학을 한 편의 드라마로 읽을 땐 눈이 뜨인다. 이 책 서문에 쓰인 홍역을 읽을 때가 그렇다. 1846년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 사이 페로제도에 홍역이 유행했다. 65년 전인 1781년 유행 이후 홍역 발생이 없던 곳이다. 그래서 그사이 태어난 인구는 홍역에 면역력이 없었다. 1846년 고래잡이 남자들이 이 질병을 가져왔을 때 인구 7800명 중 6900명이 홍역에 걸리고 60일 만에 끝이 났다.

1875년에는 피지제도에 홍역이 유행했다. 피지 왕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했는데 그때 왕과 아들이 감염됐다. 이들이 귀국했을 때 각 족장이 환영하기 위해 모였고, 그들이 돌아가서 섬 곳곳에 홍역을 퍼뜨렸다. 홍역은 증상이 있기 이틀 전부터 전염력이 있으니 본인이 바이러스를 가진 줄도 모르고 옮겼다. 3개월간 인구 약 15만 명 중 4만 명이 사망했다. 사망률이 25% 정도다. 태평양 최대의 비극이다.

루쉰의 단편 ‘형제’에서 홍역은 비극이기보다 희극이다. 동생에게 열과 발진이 있는 병이 생겼는데 의사가 성홍열이라고 했을 때는 죽는 줄 알고 걱정하다가 양의사가 ‘홍역’이라고 하니 “너는 이렇게 클 때까지 홍역을 치르지 않았단 말이야? 하하하” 하고 안도한다. 선조가 ‘제구실’이라고 했으니 어려서 이걸 앓고 나야 사람 구실을 한다는 뜻이겠다. 홍역이 풍토병이 된 지역에선 홍역이 일상적인 아이들의 병이다. 대부분 성인은 이미 면역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유행이 없던 곳에선 급격하게 다수의 인구를 감염시킨다. 그렇게 되면 청장년층의 사망률이 높다. 피지제도처럼 말이다.

그동안 내가 겪은 홍역의 역사도 길다. 2000~2001년 5만 명 넘는 폭발적인 대유행이 있었다. 예방접종으로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병이라 매우 놀랐다. 2차 접종률이 낮아서라는 것을 알게 되어 일제히 예방접종을 한 뒤 유행은 잡혔다. 백신 접종이 부진하면 홍역에 걸리는 감수성 인구가 늘어 큰 유행이 된다. 홍역 바이러스는 없어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백신으로 면역력을 갖고 있어 들불처럼 퍼지지 않을 뿐이다. 홍역의 박멸, 종식은 없을 것이다. 항체 미형성자, 백신 미접종자, 1회만 접종한 사람이 늘어나면 또 유행할 수 있다.

저자는 책 한 권에 감염병과 공생해온 인류의 역사를 쉽게 풀었다. 인류의 농경 시작과 정착으로 기생충병이 시작하고 야생동물을 가축화하면서 동물의 병이 사람 사이로 들어오고 인구가 밀집하면서 감염병이 퍼진다. 문명과 문명이 만나면서 면역력 없는 문명이 절멸하고 식민지 의료가 의학의 과학화에 기여한다. 19세기 말 코흐연구소에서 일한 일본 과학자들과 홍콩 페스트에 참여한 일본인 의학자들, 황열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일한 노구치 히데요, 세계보건기구(WHO) 천연두 박멸 사업으로 아프리카 오지를 헤매며 일한 일본인 의사들의 이야기가 군데군데 있다. 일찍이 근대의학의 본류에 들어가 자취를 남긴 일본 의학에 대한 자부심이 읽힌다.

비처럼 우박처럼 코로나19 환자가 쏟아지니 이러다 누군가는 병원에 오기도 전에 일이 날 수도 있겠다. 대규모 적군을 앞에 둔 장수의 느낌이 이런 것일까. 그나마 나랑 똑같이 생긴 인간과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전쟁이 아니라서 다행인가. 2019년 12월31일은 WHO가 중국 우한 지역의 폐렴을 처음 알린 날이다. 오늘은 코로나19 유행의 한가운데인가 시작의 끝인가, 끝의 시작인가. 사피엔스와 코로나바이러스의 공생은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최영화 아주대 감염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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