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니 허리가 굽어지고 몸이 앞으로 기울고 다리가 벌어지고 팔에 힘이 없어 축 늘어지면서 고개가 툭 떨어진다. 입이 앞으로 툭 튀어나오고 눈꺼풀을 반만 올린 채 길을 보기 위해 간혹 고개를 들 뿐이다. 비가 내리는데 비도 피해지지 않는다. 느릿느릿 되는대로 걸으며 혀끝에 달린 욕을 간혹 뱉어낼 뿐이다. 주말이니 소리 내어 울어도 된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소리 내어 우는 울음인가. 이 울음의 성격을 고민한다. 힘들어서 우는 것인가, 슬퍼서 우는 것인가, 억울해서 우는 것인가? 분노인가, 절망인가, 포기인가? 얼마 동안 울 것인가?
술라의 할머니 에바는 먹고사는 일이 너무나 절박해져 기차 밑에 다리를 넣고, 외다리가 되는 대신 보험으로 먹는 문제를 해결했다. 어머니 해나는 아무하고나 자는 과부다. 술라는 남자에게 의지하지 않고 할머니를 모시지 않으며 자식도 갖지 않고 산다. 열두 살 소녀 시절에 술라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만큼 많은 것을 공유했던 친구 넬은 깨끗이 떠나버린 남편을 기다리며 아이를 키우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넬은 병들어 약값도 없이 죽어가는 술라에게 “남자들은 붙잡아둘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술라는 대답한다. “나보다 더 가치가 있지는 않아. 게다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서 남자를 사랑한 적은 없었어.” 우연히 삶에 내던져진 이유대로 술라는 자신의 온전한 삶을 살았다. 그것이 제대로 된 인생이라고.
술라는 흑인들의 마을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가지 않기에 악마로 여겨진다. 여성이 남들과 다른 삶을 살면 악마가 된다. 한 마을에 들어온 악마라면 괴롭히고 쫓아내야 할 텐데 흑인은 다르다. 악이라 하더라도 제 갈 길을 가고 제 뜻을 다하도록 내버려둔다. 사람에 대해서도 그렇다. 외부인에겐 느슨함, 부주의함, 심지어 관대함으로 보이는 이런 태도는 선한 힘 외에 다른 힘들도 나름대로 타당하다는 생각 때문에 나온다. 사람들은 홍수, 백인, 홍역, 기근과 무지를 견딘다. 역병과 가뭄은 계절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그들을 돌봐주신다고 믿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도 누군가에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런 마당에 어째서 하느님이 자신들을 봐주겠는가? 그들은 분노는 잘 알지만 절망은 모른다. 자살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로 죄인에게 돌을 던지지 않는다. 공존하고 견딜 뿐이다. 질병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것의 목적은 견디는 거다.
2009년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 나는 미국 국립보건원에서 연수 중이었다. 큰 소란 없이 일상이 유지되다 백신이 공급되고 각 지역 정해진 장소에 가서 백신을 맞도록 홍보됐다. 문제는 공급이 충분치 않았던 것인데 살고 있던 베세즈다시에서도 백신이 일찍 동났다. 하지만 떠도는 정보로는 흑인이 많이 사는 지역은 백신 접종률이 높지 않아서 백신이 남아돈다고 했다. <술라>를 읽으며 그때의 특별한 경험을 떠올렸다.
밤 당직이 끝나고 하루가 또 시작되니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언제 시작됐는지 모르겠다. 눈물이 나지만 길게 울 필요는 없다. 쌓인 피로를 해소하기 위한 울음일 뿐 분노도 절망도 아니다. 포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기엔 아직 고통의 시간이 짧다. 잠시 허리를 눕히면 다시 일어나고 싶어질 것이다. 나는 아직 기차에 발을 넣고 싶을 만큼 궁지에 몰리지 않았고 지갑이 텅 빈 채 홀로 질병의 고통을 겪고 있지도 않다. 될 대로 될 것이다.
최영화 아주대 감염내과 교수·<감염된 독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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