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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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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통이 필요하지 않은 여기가 천국

100년 전 스페인 독감을 통해 인플루엔자 강의를 하는
<코로나 팬데믹을 닮은 스페인 독감>
등록 2021-02-02 21:34 수정 2021-02-03 08:34
<코로나 팬데믹을 닮은 스페인 독감> 돈 브라운 글·그림, 두레아이들 펴냄, 2020

<코로나 팬데믹을 닮은 스페인 독감> 돈 브라운 글·그림, 두레아이들 펴냄, 2020

나는 그림책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컸지만 정이 든 그림책은 아직도 가지고 있다. 그림이 좋아서 좋을 때가 있고 한 줄 문장의 재치가 멋져서 두고 보기도 한다. 읽기 어렵다고 느껴지는 책이 그림책으로 나왔다면 사 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간략하게 이해하고 시작하면 무엇이든 그렇게 막막하지 않다. 덕분에 ‘만화로 보는’ 천문학, 물리학, 수학, 경제학 이런 책에 쉽게 혹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란 말을 나는 ‘백 번 들어도 모르는 내용을 한 번 만화로 보면 알 수 있다’로 해석한다.

전 국민이 코로나19 관련 뉴스를 듣고, 새로운 약제나 연구 결과를 기자들이 먼저 알고 내보내니, 감염내과 의사라는 직함 때문에 받는 질문이 유달리 날카롭고 답하기가 조심스럽다. 백신 뉴스는 ‘아직 전문을 읽지 못했어요’가 답이고 치료제에 대해서는 ‘그거라도 있어서(으면) 좋아요’가 내가 준비해둔 답이다. 앞날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견뎌야 할 날이 많다고 희망을 줄이고, 해온 일에 대해서는 앞으로는 더 잘해야 한다고 눙쳐버린다. 산소통이 필요하지 않은 오늘, 여기가 천국이다.

환자의 산소를 사기 위해 산소통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뉴스가 가슴을 저민다. 죽은 자들의 무덤보다는 산소를 기다리는 환자의 헐떡임이 내겐 더 고통스럽다. 산소만이 고통을 줄인다. 중환자실로 오는 사람들은 다 숨이 문제다. 아무리 숨을 깊게 들이쉬려고 해도 펴지지 않는 가슴으로 얕은 숨을 수없이 들이마신다. 숨이 차다. 산소가 고프다(air hunger). 이런 고통을 몰랐던 코로나19 이전의 팬데믹 강의는 빈 소리다. ‘1918~1919 스페인 독감으로 약 5천만 명에서 1억 명의 인구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시작하지만 산소 고픔과 헐떡임을 실제로 느끼지는 못했다.

코로나19를 겪고 나서야 1918년의 비극적 감염병을 돌이켜 다시 읽었다. 두꺼운 번역서보다 두레아이들의 <코로나 팬데믹을 닮은 스페인 독감>이 두고 보는 책이다. 인플루엔자의 어원, 스페인에서 시작하지 않은 스페인 독감(그렇다면 어디인가?), 세균이 원인인 줄 알고 백신을 개발하고, 그 백신을 믿고 맞기도 했다는 것, 독감의 책임을 독일에 돌리려고 한 것, 돼지독감이 원인이라는 것과 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질병이라는 것을 밝히는 과정, 80년이 지나 죽은 군인의 보관된 폐 조직에서 바이러스를 찾아내고 유전자로 다시 만들어낸 것까지 인플루엔자에 대한 강의로 이보다 좋을 수 있을까 싶다.

“환자들은 질식하기 전까지 숨을 쉬기 위해 애썼지요. 이 병은 정말 끔찍한 병입니다.” 저자 돈 브라운은 청색증을 보이며 죽어가는 환자의 얼굴을 회갈색으로 담아냈다. 코로나19와 달리 20~30대 젊은이가 많이 죽은 100년 전 팬데믹은 잔인하다. 식민지 한국에서는 1918년 10월께 시작해 약 400만~800만 명이 감염되고 1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연이 자신의 온 힘을 끌어모아서 인간과 인간이 지닌 힘이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지 보여준 것 같아요.” 군대에서 스페인 독감을 목격한 어느 의사의 회상이다.

지구의 어느 곳에든 고통을 덜어줄 기적 같은 산소가 제한 없이 도달하기를 기도한다. 책에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미국의 귀중한 자산,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바칩니다”라고 헌사가 쓰여 있다. 대한민국의 질병관리청에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최영화 아주대 감염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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